†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작은 이에게 사랑 실천을 / 투르의 성 마르티노 주교 기념일[1111](마태 25,31-40)
마르티노 성인은 316년 무렵, 현재 헝가리의 솜바테이 지역인 판노니아에서 이교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로마에서 공부한 다음 군인이 된 그는, 어느 날 추위에 떨고 있는 거리의 걸인에게 자신의 외투 절반을 잘라 주었다. 그날 밤 꿈속에 그 외투 차림의 예수님께서 나타나시는 기적의 신비 체험을 하고 나서 곧장 세례를 받았다. 그 뒤에 사제가 되었으며, 370년 무렵 프랑스 투르의 주교로 뽑혔다. 착한 목자로서 모범을 보이고, 수도원들을 세웠으며, 성직자들을 교육하고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다가 397년 프랑스 중부의 캉데생마르탱에서 선종하였다. 프랑스 교회의 초석을 놓은 그는 프랑스 교회의 수호성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 존경받고 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구원하시고자 당신 아들 예수님에게 지상 순례를 명하시어, 당신 뜻을 직접 전하게 하셨다. 오래 전에 물로서 심판하셨지만 인간의 타락은 줄어들 줄을 몰랐다. 예언자들을 통해 수차 지적하였는데도 안하무인이었다. 모세에게 일러준 자비에 바탕을 둔 그 십계명도 사회의 기득권 인사인 율법 학자 등에 의해 권위의 법으로 탈바꿈 해 어린 백성에게는 오히려 짐으로 멍에를 더 지우는 꼴이 되고 말았다. 그리하여 가진 자는 더 갖게 되고, 약자는 더 궁핍한 이르는 지경이었다. 그래서 예수님은 비록 짧은 삼년의 공생활 이었지만, 엄한 율법을 사랑의 계명으로 일러주셨다. 하느님 사랑과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이웃 사랑이었다. 그리고 이 사랑 실천의 자세로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며,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인 지침서까지 일러주셨다. 이것이 소위 말하는 ‘황금률’이다. 예수님께서는 지상의 여정을 끝내시고 아버지 곁으로 가시면서, 죄의 구원과 같은 베푸는 자비의 일차 순례와는 달리, 우리가 베푼 사랑의 점검 차원에서 ‘최후의 심판’을 하러 다시 이차 순례를 하신단다. 그때는 자비가 담긴 회개와 용서가 아닌, 사랑 실천을 점검인 심판만 하신다나. 그래서 초라한 구유의 아기 모습이 아닌, 마치 임금처럼 ‘영광에 싸여’ 오신단다. 그리고 우리가 곤궁에 처한 이들에게 얼마나 많은 선행을 베풀었는지의 여부에 따라, 각자 행실을 판가름하시고 상이나 벌을 내리신단다. 그 많은 율법이 아닌, 작은 이 사랑 그 하나만 가지고서. “내가 영광에 싸여 천사와 함께 와 영광스러운 옥좌에 앉을 것이다. 그리고 모든 이가 내 앞으로 모이면, 나는 그들을 오른쪽왼쪽으로 가를 것이다. 그리고는 나는 오른쪽에 있는 이들에게 말할 것이다. ‘내 아버지께 복 받은 너희 의인들아, 와서 창조 때부터 준비된 나라를 차지하여라.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들였다. 또 내가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내가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으며, 내가 감옥에 있을 때에 찾아주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중 한 사람에게 해 준 게 바로 내게 해 준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종말에 의인과 악인의 구분하는 것은 오직 한 가지, 보잘것없는 이들을 어떻게 베풀었는지를 보시겠단다. 다시 말해 심판에 필요한 유일한 조건은 소외된 작은 이들을 위한 구체적인 사랑을 실천 여부라나. 그것도 보통 작인 이가 아닌, 최상인 ‘가장 작은 이’다. 그리고 그들이 바로 예수님 당신이라며, 지금껏 당신이 보여주신 자비를 그대로 실천하라는 거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과 이웃 사랑의 두 계명을 하나로 묶으셨다. 그렇다. 온 힘과 마음, 정신을 다해 우리를 기다리는 작은 이 찾아 나서자. 그들이 바로 예수님임을 생각하면서.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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