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고백성사의 신비(비의=秘義)와 작용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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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중애 | 작성일2024-11-12 | 조회수108 | 추천수2 | 반대(0) 신고 |
고백성사의 신비(비의=秘義)와 작용 인간의 나약함으로 또는 개인의 의지의 부족으로 상습적인 죄를 자주 범하는 인간들의 허약함을 잘 아신 하느님은 그 자비하심으로 우리 주 예수님에게 사도들을 통하여 사죄권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시대가 흐름에 따라 하느님의 자비의 선물인 고백성사가 고마운 은혜임을 망각해 너무 두려운 것으로 인식되었고 갈라진 형제들은 이를 반대하기까지 하였습니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매우 열심한 신자들도 고백하는 것을 짐스러워 하는 경향을 가지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럴지라도 고해성사는 다른 어느 성사보다도 강조되고 권장되어야 할 만한 것입니다. 다만 기계적으로 흐른 형식의 상태를 벗어나 전심으로 하느님께 협력하는 참된 고해성사가 되도록 하는 것이 오늘날의 성교회의 책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1. 고해성사는 영세한 후에 범죄한 신자들에게 그리스도의 구속공로에서 비롯하는 은혜를 베푸는 성사이며. 2. 고해성사는 하느님 자비의 선물입니다. 세례를 받은 이들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긴밀한 관계를 맺게 됩니다.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 예수와 하나가 된 우리는 이미 예수와 함께 죽었다는 것을 모르십니까? 과연 우리는 세례를 받고 죽어서 그분과 함께 묻혔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영광스러운 능력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것처럼 우리도 새 생명을 얻어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같이 죽어서 그분과 같이 다시 살아나서 또한 그분과 하나가 될 것입니다. (로마 6,3-5)미사성제 또한 예수님의 희생적 죽으심을 기념하는 제사입니다.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내어주는 내 몸이다. 나를 기념하여 이 예식을 행하여라. (루가 22,19) 세례성사나 성체성사와 같이 고해성사도 그 은총의 원천은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상의 죽으심입니다. 예수께서 부활하신 날 밤에 고해성사를 세우신 이유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성혈을 흘리신 연후에야 비로써 우리 죄가 씻겨져 사함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세례때에 원.본죄와 그 벌까지 사함을 받은 것과 고백성사에서 세례받은 후에 범한 죄의 사함을 받는 것은 비록 골고타의 십자가에서 흐르는 예수님의 피에 젖어야만 죄 사함을 받을 수 있는것과는 같을지라도 이 두 가지는 엄격히 구별되어야 합니다. 다시말해 신자가 아닌 외교인의 죄와 하느님의 자녀가 된 그리스도 신자의 죄와는 큰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세례를 받은 그리스도인은 문자 그대로 재생되지만 신자로서 죄를 범한 이는 비록 배교적인 극악한 대죄를 지었다 하더라도 그가 이미 세례성사로 한번 재생하여 영혼에 지울 수 없는 인호가 박힌 이상, 재생이란 말을 적용시킬 수 없는 노릇입니다. 그러므로 대죄인이 된 그리스도 신자는 재생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개과천선(改過遷善) 하는 것입니다. 재생이나 부활은 본인이 죽은 자이므로 아무런 협력을 할 수 없는 수동적 입장이지만 치료는 본인의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협력이 있어야만 합니다. 마치 중병에 걸렸을때 약을 복용하고 수술을 하는 것은 결국 몸에 남아 있는 기운을 회복시켜 새로운 저항력으로 병을 이기는 것으로 병자 자신이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하느님을 모르는 사람이 범한 죄에 비해 세례로 하느님의 자녀가 된 그리스도 신자가 범한 죄가 더 큰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그것은 노예가 주인에게 반항하는 죄보다 자식이 부모에게 거역하는 죄가 더 크듯 외교인과 신자와는 그런 차이가 나며 그러한 관계로 벌이 더 엄한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골고타에서 그 무섭고 참혹한 사건은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으로 하여금 죄를 보상하게 하는 형사 재판의 판결이며 그 형벌의 집행이었습니다. 따라서 신자로서 대죄를 지어 대죄인이 된 우리는 예수님에 대한 형 집행, 곧 십자가 상의 제사가 성사적으로 재현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고해성사를 볼 때 이러한 사실에까지 생각하는 분은 드물것입니다. 우리는 고해성사를 볼때마다 우리 죄로 인해 당신의 외아들을 엄하게 십자가 형에 처하도록 하시는 하느님의 심판대에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이 재판이 끝날때에 우리는 죄의 사함을 받지만 하느님이 공의하신 만큼 아무런 보속도 없이 무조건 죄를 용서해 주시지는 않는다는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무서운 죽음의 고통을 겪으신 뒤에야 당신이 간구하신 인류의 구원을 하느님이 승낙하셨듯이 우리도 아무런 통회나 보속없이 자기 본죄에 대한 용서를 바란다는 것은 너무나 자명한 일입니다. 탕자의 비유는 이러한 것을 적나라에게 말해 주고 있습니다. 어서 아버지께 돌아가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이제 저는 감히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할 자격이 없으니 저를 품꾼으로라도 써 주십시오 하고 사정해 보리라. 마침내 그는 거기를 떠나 자기 아버지의 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집으로 돌아오는 아들을 본 아버지는 측은한 생각이 들어 달려가 아들의 목을 끌어안고 입을 맞추었다. 아버지는 .... 죽었던 내 아들이 다시 살아왔다. 잃었던 내 아들을 다시 찾았다. 하고 말했다. 그래서 성대한 잔치가 벌어졌다. (루가 15,11-32 탕자의 비유 참조) 탕자의 비유에서 처럼 탕자는 말뿐만 아니라 진심으로 뉘우쳐 다시는 아버지의 집에서 품꾼 노릇이라도 할 각오를 하였으므로 이는 참된 통회요 보속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백성사를 받는 죄인은 무엇보다 스스로 하느님께 전심전력으로 협력해야 합니다. 앞서 말했듯이 이 형식은 일종의 재판이기에 거기에는 피고, 검사(원고)가 있고 엄격한 심리, 공판, 판결이 있습니다. 두말할 것 없이 죄인은 피고인 동시에 검사이고 고백신부는 재판장 즉 하느님을 대리합니다. 고백소는 영혼의 가장 큰 그리고 완벽한 종합병원인 동시에 완전한 치유소 입니다. 고해성사를 참되게 받는다는 것은 세상의 죄를 지고 가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으로서(요한1,29) 십자가 상에 못박혀 돌아가시어 우리 죄를 대신 보속하신 예수 그리스도와 결합하여 예수님 보속의 미소한 일부분을 넘겨 받아 하느님께 드리는 것이니, 깊은 자각 없이 기계적으로 고해성사를 받는다면 이는 크나큰 잘못을 저지르는 것이며 오히려 자신과 하느님을 속이는 것임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매번 진지하게 성사를 받고 헌신적으로 보속한다면 우리의 생활은 저절로 속죄적인 회개의 생활이 되어 온 인류를 구속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게 되는 것입니다. 고백성사의 효험 은 고명한 모든 대죄와 소죄를 사하고 지옥 벌을 면케하며 또한 잠벌을 감해줍니다. 고해성사를 받았다고 해서 잠벌이 모두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고명치 않은 소죄와 고명하긴 했으나 그 소죄를 보속하고 앞으로 피할 마음이 없는 것은 사해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그런 소죄에 대한 애착심을 끊어버릴 결심(정개)을 하지 않는 한 거의 매주 성사를 보고 그 소죄를 고백하더라도 아무런 영적 이익도 없을뿐 아니라 오히려 완덕으로 나아가는데 있어 해로운 습성을 키우기 쉽습니다. 성찰할때에 심각한 죄의식이 없다면 통회와 정개도 있을 수 없습니다. 참된 통회는 마음 속의 영적 밭을 깊이 파헤쳐야 합니다. 통회할 때 십자가 곁으로 가서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대죄가 없으면 소죄만이라도 고명하는 신심고해를 자주 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 이유는 겸덕과 희생적 정신을 수련할 수 있도록 성교회의 규칙은 신심 고해를 마련해 놓았습니다. 그러나 보속할 마음도 없이 다만 습관적으로 자주보는 신심 고해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영혼에 해를 끼치게 되므로 가급적이면 한 달에 한 번씩 정성껏 완전한 고해를 하는 것이 효과적이고 유익합니다. 진심으로 자기의 결점을 고치려면 적극적으로 실효성 있는 교정책을 강구하고 또 이를 인내심을 가지고 실천해야 합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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