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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행복보다 겸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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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백봉7 쪽지 캡슐 작성일2024-11-12 조회수146 추천수4 반대(0) 신고

 

 

 

 

 

 

2024년 나해 연중 제32주간 화요일 

 

 

 

<행복보다 겸손> 

 

 

 

 복음: 루카 17,7-10

 

 

 


십자가를 지고 가는 예수


엘 그레코 작, (1600-1605),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
 

 


    저는 인생의 목표를 행복으로 여기고 살아왔습니다. 그리고 그것에 대해 후회가 없습니다. 그 방향이 제가 사제가 되도록 이끌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요즘은 행복해 보이지 않는 사람들까지 본인들이 행복하다고 말하니 난처합니다. 여기서 더 구체적인 방향이 있어야겠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은 어떤 종이 밖에서 일하다가 집에 돌아오니 주인이 자신에게 식사 시중을 들라고 하라고 합니다. 그렇다고 주인이 종에게 고마워해야 하겠냐는 것입니다. 종은 주인의 집에서 일하며 한 끼 먹을 수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입니다. 그러니 하인은 학대하지만 않는다면 주인에게 자신을 종으로 써 준 것에 감사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런 마음을 갖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이를 위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서열을 정해주시기 위해서입니다. 


    2012년 5월 20일 방영된 동물농장에서 오토바이를 쫓는 개 뭉치가 방영되었습니다. 뭉치는 하루 종일 동네 슈퍼 앞에 앉아 있다가 오토바이만 지나가면 그 앞을 가로막고 마구 짖어댑니다. 그런데 사실 뭉치가 쫓는 오토바이는 단 한 대뿐이었습니다. 다른 오토바이는 쳐다보지도 않았습니다. 그 오토바이는 슈퍼 앞쪽에 있는 한 마트의 배달용 오토바이였습니다. 처음엔 경쟁 마트의 오토바이기 때문에 그런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사실 슈퍼 앞에서 매일 지키고 있었지만, 그의 집은 따로 있었습니다. 


    실제 그의 공격 상대는 오토바이가 아니었습니다. 바로 그 마트에서 기르고 있는 누렁이 때문이었습니다. 1년 전에 누렁이에게 서너 번 물린 적이 있어서 누렁이가 무서워서 그 마트까지는 가지 못하고 그 마트의 오토바이에 괜한 화풀이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복수를 계획한 것이 어언 1년이었습니다. 


    어느 날, 뭉치는 기회를 노렸다가 오토바이와 동행하는 누렁이에게 달려들었습니다. 누렁이도 화가 나 뭉치를 덮쳤고 순식간에 싸움으로 번졌습니다. 뭉치는 누렁이의 힘에 못 당하면서도 끝까지 물러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떼어 놓아서 간신히 뭉치가 큰 상처를 받지 않았지만, 여전히 뭉치는 끝까지 싸울 기세였습니다. 


    결국 전문가들이 왔습니다. 그들이 하는 이야기는 “뭉치가 자신의 서열을 인정하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뭉치와 누렁이가 자유롭게 싸울 공간을 마련해주었습니다. 이제 누렁이와 뭉치는 입과 발에 보호대 등을 착용하고 철창으로 만든 좁은 공간에서 싸움을 벌이도록 놓아두었습니다. 결국 승자는 누렁이가 됐고, 뭉치는 자신의 패배를 인정했습니다. 그런 다음에는 뭉치가 다시는 집을 나가 슈퍼로 가지 않고 모든 것을 잊고 편안하게 집에서 생활하게 되었습니다. 


    압살롬의 아버지는 다윗이었습니다. 그런데 다윗에게 반란을 일으켰다가 결국 전쟁에서 패하고 죽고 맙니다. 그가 아버지에게 반항하게 된 것은 그의 동상 타마르 때문입니다. 타마르의 이복 오빠 암논이 타마르를 탐하고 버린 것입니다. 이에 분노해 압살론은 타마르를 죽였습니다. 그런데 다윗는 압살론을 유배 보냅니다. 다윗에게는 모두가 자녀였지만, 압살론은 이해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압살론은 다윗에게 반기를 들었습니다. 압살론이 죽었을 때 다윗은 한없이 슬퍼하였습니다. 압살롬이나 타마르나 암논은 다 그의 자녀들이었습니다. 자녀들끼리 죽고 죽이는 것은 가슴 아픈 일입니다. 압살론은 다윗의 자비를 이해했어야 합니다. 그 자비 앞에서 겸손해질 수 없자 이 모든 사단이 벌어진 것입니다. 


    소금인형은 자신을 알기 위해 많은 곳을 여행했습니다. 소금 광산을 지나 소금 사막을 넘어 소금 염전에 다다랐습니다. 염전 앞에는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광활한 바다가 펼쳐져 있었습니다. 소금인형은 멈칫하며 바다에게 물었습니다. 
    “너는 누구니?”
바다가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들어와서 보렴.”
그래서 소금인형은 바닷속으로 첨벙첨벙 들어갔습니다. 들어갈수록 자신이 녹아내리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래도 더 깊숙한 곳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한 점이 녹기 전에 소금인형은 경탄하며 외쳤습니다. 
    “아. 이제야 내가 누군지 알겠군!”


    소금인형은 바다에서 나왔습니다. 그러니 바다가 아니면 소금인형이 누구인지 알려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소금인형은 바다와 가까워질수록 아무것도 아니게 됩니다. 바다가 아니었으면 자신도 존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께 가까이 가면 겸손해집니다. 그러나 압살론은 그럴 줄 몰랐습니다. 그의 목적이 겸손이 아니고 자신이 믿는 행복이었기 때문입니다. 


    러시아의 성 블라디미르는 아버지의 폭정대로 형제를 죽이고 황제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폭정은 물론이요, 일부다처제를 주장하며 타락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페룬(Perun)이라는 최고 신을 포함하여 여러 신을 숭배했는데, 그 신에게 특히 헌신했습니다.
몸이 아프니 겸손해지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접할 수 있는 모든 종교를 접해보기로 결심합니다. 그러다 성 소피아 성당의 위엄을 본 신하들의 말에 그는 가톨릭교회에 귀의하기로 결심합니다. 


    서기 988년에 블라디미르는 크림 반도의 그리스 도시인 케르소네수스에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일부 기록에 따르면 그가 침례를 받기 전에 눈병이 있었다고 하며, 전설에 따르면 그가 침례를 받고 물에서 나올 때 눈병이 기적적으로 치료되었다고 합니다. 이 경험은 블라디미르에게 깊은 영향을 미쳤고, 그리스도교를 진정으로 받아들이게 되었고 결국 성인이 되었습니다.


    압살론은 겸손에서 출발했지만, 아버지 앞에서 교만해졌습니다. 그러나 블라드미르는 교만함으로 시작하였지만, 하느님의 자비 앞에서 겸손해졌습니다. 각자 행복해지자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점점 겸손해지는 길을 택했던 블라디미르를 본받을 필요가 있겠습니다. 


    뭉치는 1년 동안 자신을 물었던 이웃집 개에 대해 복수를 다짐하였습니다. 그러다 둘이 한 우리 안에 싸우도록 붙여놓았을 때 뭉치는 싸움에서 밀린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다시는 그 집 앞에 나타나지 않고 자신의 집에서 행복하게 삽니다.  불행의 시작과 끝은 교만입니다. 그렇다면 가장 완전한 행복과 천국의 길은 겸손임을 잊으면 안 될 것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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