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인지 아닌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깊이 같이 묵상해보는 시간을 가져봤으면 합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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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강만연 | 작성일2024-11-12 | 조회수73 | 추천수1 | 반대(2) 신고 |
이 세상 모든 사람은 신앙을 가진 사람이라면 하느님의 사랑을 듬뿍 받고 싶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이와 관련해서 한 가지 딜레마 같은 문제가 있습니다. 하느님은 모든 사람을 사랑하실까 하는 문제입니다. 하느님의 속성 자체가 차별이 없고 누구에게나 무한한 자비의 손길을 주신다는 대명제는 맞는 말씀입니다. 이 명제가 맞고 또 우리는 하느님은 그런 분이시라고 믿으면서도 과연 하느님께서 진정으로 사랑하실까 하는 질문을 던질 경우도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서로 모순되는 문제점이 발생한다는 것입니다. 얼핏 보면 모순 같으나 모순이 아닙니다. 일종의 생각의 착시현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런 생각을 가지며 또한 그런 생각을 하게 되는 근원적인 동기는 우리의 마음이 우리의 양심에 비추어봤을 때 뭔가 꺼림직함을 느낄 때 그와 같은 게 일어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전에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네들란드 주교회의에서 발행한 교리서가 있었다고 합니다.
최근에 다시 개정되고 수정 보완돼 출판됐습니다. 기존 정통 교리서와는 좀 아주 특이한 구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교리서를 보면서 부쩍 이런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봅니다. 사람은 아무도 보지 않는다고 해서 나쁜 짓을 해도 그 나쁜 짓을 하고 난 후에 그냥 아무렇지도 않을 것 같을까요? 왜냐하면 아무도 자신의 행동을 보지 않았기 때문에 말입니다. 아무리 아무도 보지 않았다고 해도 자신의 행동과 생각을 감찰하시는 분이 있습니다. 굳이 멀리 하늘에 계신 하느님까지 갈 필요도 없습니다. 이미 우리가 사람이란 존재로 창조됐을 때 그 몸에 숨이라는 영을 하느님께서 불어넣어 주실 때 하느님의 영인 생령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오타가 아닙니다. 성령이라고 하지 않고 생령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살아 있는 영을 말합니다. 이 영이 피조물인 우리 인간 속에서 죽지 않는 이상은 그렇습니다. 바오로 사도도 언급했습니다. 아담 이후 모세의 율법이 있기 전까지도 비록 율법은 없었지만 그 공백 사이의 기간 동안에는 인간의 양심이 율법의 기능을 했다는 것입니다. 이때의 율법은 하느님과 그리스도로 향하기 위해 일시적으로 유도하는 기능을 한다고 했습니다. 이를 빗대어 감시자 역할을 하게 된다고 했습니다. 율법이 존재하지 않았다고 해도 이미 그 양심이 율법의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는 말과도 같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논리적인 바탕 위에 누군가가 이런 질문을 던진다면 수긍이 갈까요? 가지 않을까요? 바로 이런 질문입니다. 사람이 하느님보시기에 양심이 꺼려지는 행동을 했어도 이 세상 누구도 나의 이런 생각과 행동을 본 사람도 없을 테니 물론 비록 하느님 보시기에는 합당한 행동은 아니라고 하는 최소한의 일말의 양심으로 봤을 때에는 부끄러운 면이 없지 않아 있다는 것을 스스로가 인정을 하면서도 자신의 행동에 대해서는 하느님의 무한한 자비를 근거로 해서 자신의 행동을 하느님의 자비라는 속성에 묻혀 가기를 바라는 심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만약 이러한 심리가 많이 작용하는 사람의 경우에는 자신 속에 있는 이성이 하느님의 본성인 양심을 억누르고 있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게 결과적으로 보면 좋지 않은 것인데 우리는 이런 속성이 발현될 때는 궁색한 변명으로 자신을 합리화하려고 합니다. 마치 남의 허물에 대해서는 엄격하지만 자신의 허물에 대해서는 똑같은 잣대로 대지 않고 관대하게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이제 정리를 해보겠습니다. 자신이 하느님으로부터 사랑받는 존재인지는 자신의 양심을 들여다보면 답이 나오는 것입니다. 자신의 행동이 선으로 향하는 것인지 아니면 선을 행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는 있지만 그 선을 행하지 못하게 하는 자신 안에 있는 또다른 나 자신이 그와 같은 일을 하게끔 만든다면 바오로 사도의 고백처럼 비참한 인간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와 같은 위대한 성인도 그럴 위험에 빠질 수 있다고 한다면 그저 우리와 같은 범인들 같은 경우는 말해야 무엇하겠습니까?
우리는 이런 관점으로 우리 자신을 끊임없이 되돌아봐야 할 것입니다. 흔히들 말하는 '양심성찰'과도 같은 것이지만 비슷하기도 하지만 아주 미세한 차이가 있습니다. 옛날에 궁녀들도 임금의 성은을 입기 위해 온갖 행동을 다 했습니다. 비록 인간 세상의 왕에게도 그러할진대 이 세상 만물의 창조주이신 하느님이시고 만왕의 왕에게 간택을 입는 성은을 입으려면 자신의 양심이 어디로 향해 가고 있어야 하는지는 불을 보듯 누구나 다 알 것입니다. 알긴 다 아는데 단지 그걸 실천을 하지 못해서 그게 문제라면 문제가 될 것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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