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반영억 신부님_돌아가 감사를 드렸다 | |||
---|---|---|---|---|
이전글 | 이전 글이 없습니다. | |||
다음글 | 엘리사의 매일말씀여행(루카 17,11-19 / 연중 제32주간 수요일) | |||
작성자최원석 | 작성일2024-11-13 | 조회수106 | 추천수4 | 반대(0) 신고 |
바오로 사도는 “항상 기뻐하십시오! 늘 기도하십시오! 어떤 처지에서든지 감사하십시오!”(1테살5,16-18)하고 말합니다. 그러나 어떤 처지에서든지 감사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게 보입니다. 차고 넘칠 때는 물론 부족함을 느끼는 가운데에서도 감사한다는 것은, 아무나 하는 일이 아닙니다. 잘되면 자기가 잘했기 때문이고, 잘못되면 탓을 다른 사람이나 하느님께 돌리고 원망하기도 합니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것에 대해 서운함이 앞섭니다. 그 처지가 어떠하든 감사하면 또 감사할 수 있는 은혜가 주어지는데 그 순간을 참지 못하고 또 은혜를 입고도 전혀 아닌 양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마땅히 받을 것을 받았다고! 아니, 더 받아야 하는 데 받지 못했다고 불평하는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던 중에 열 명의 나병환자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멀찍이 서서 예수님을 부르며 “스승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루카17,13) 하고 외쳤습니다. 사실 그들은 부정 탄 사람들로 낙인이 찍혀 멀리 동네 밖에 쫓겨나 살아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보시고 “가서 사제들에게 너희 몸을 보여라” 하고 이르셨고 그들이 가는 동안에 몸이 깨끗해졌습니다. 그런데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은 병이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며 돌아와,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습니다.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열 사람이 깨끗해 졌는데 한 사람만이, 그것도 유다인이 아닌 사마리아 사람이 ‘돌아와’감사를 드렸습니다. 그는 사제에게 몸을 보이는 것보다 먼저 예수님을 뵙고 감사를 드리고 싶은 마음이 앞섰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유다인들은 하느님의 선물을 그들이 당연히 받아야 할 몫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선택 받은 사람이 누려야 할 혜택을 누린 것뿐이었습니다. 얼른 가서 사제에게 보이고 자신의 삶을 원래 자리로 되돌리고 싶은 마음이 앞섰습니다. 아니, 하느님의 은총보다 자기의 노력으로 이루어냈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구원의 혜택은 이방인, 죄인에게도 열려 있고, 한 인간에게 구원을 가져다 주는 것은,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은총과 사람 자신의 믿음과 협력이 중요합니다. 사마리아 사람은 이스라엘의 자녀들 가운데 들지 않는 이방인이었고 자기가 하느님께 어떤 것을 내세운다는 것은 감히 생각할 수조차 없었습니다. 그러나 자비를 간구했고 결국 얻었으며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가 몸의 치유를 통해 하느님을 만났다는 것이 더 큰 기쁨입니다.
그러나 아홉은 어디로 갔습니까? 그들은 그야말로 화장실 들어갈 때 마음과 나올 때의 마음이 달랐습니다.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간청하여 큰 은총을 입었음에도 하느님을 영접하지 못했습니다. 마땅히 받아야 할 선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주어진 은혜를 당연히 생각 말고 은혜를 통해서 능력의 하느님을 만나시길 바랍니다. 매사에 감사할 줄 알아야 하겠습니다. 감사하지 못하면 결국은 불평불만 속에 살아가게 됩니다. 감사할 것을 찾아보십시오. 살아있음이 감사입니다.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인간으로 오신 예수님, 십자가의 죽음까지도 받아들이신 예수님을 생각한다면, 받기만 하는 것, 기다리기만 하는 것, 청하기만 하는 것, 이제는 그만할 때가 되었습니다.
“주님은 나의 힘, 나의 방패, 내 마음 그분께 의지하여 도움을 받았으니 내 마음 기뻐 뛰놀며 나의 노래로 그분을 찬송하리라”(시편28,7). 구원은 감사하는 이들의 것입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