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연중 제32주간 목요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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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박영희 | 작성일2024-11-14 | 조회수94 | 추천수5 | 반대(0) 신고 |
[연중 제32주간 목요일] 루카 17,20-25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
행동 과학자 로건 유리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좋은 인연이란 ‘만드는 것’이지, ‘발견하는 것’이 아니다.” 참으로 공감가는 말입니다. 내 삶에 의미가 되어주고 기쁨이 되어줄 ‘좋은 인연’은 내가 가만히 기다리면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게 아니지요. 먼저 내가 ‘좋은 사람’이 되고자 적극적으로 노력할 때 그 노력의 결과로 조금씩 그런 사람으로 변화되고, 좋은 사람들이 그런 내 모습에 이끌려 다가오면 비로소 그들과 내가 서로의 부족함을 채워 함께 완성으로 나아가는 ‘좋은 인연’이 되는 겁니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가만히 입을 벌리고 서서 인연이라는 포도송이가 내 입 안으로 떨어지기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자기가 참된 사랑을 못해본 건 아직 좋은 인연을 만나지 못해서라며 ‘상황 탓’만 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모습입니다.
오늘 복음은 ‘하느님 나라’의 존재와 본질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예수님 시대 유다인들에게는 ‘하느님 나라’가 ‘언제’ 오느냐가 가장 큰 관심사였습니다. 하느님께서 보내신 ‘메시아’가 혜성처럼 나타나 자기들을 핍박하고 괴롭히던 로마를 물리치고 평화와 번영을 가져다 줄거라고 기대했던 것이지요. 즉 그들에게 ‘하느님 나라’는 지금의 힘들고 괴로운 세상과는 전혀 다른 ‘딴 세상’, 부정과 불의가 만연한 이 세상을 뒤집어 엎고 만들어 갈 ‘새로운 세상’이었던 겁니다. 그런 그들에게 예수님은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 나라는 눈에 보이는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변화로 드러나는게 아니라,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통해 우리 마음 속에서 시작된 내적인 변화가 완성될 때 비로소 그 참된 모습이 겉으로 드러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변화는 이미 ‘우리 가운데’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이지요.
하느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믿는 이들이 누리는 참된 기쁨과 행복입니다. 즉 특별한 장소나 특정 상황에서만 발현되는 게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과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따르는 이들의 마음 안에서 언제든 시작될 수 있고 또 이미 시작되었지요. 그러니 ‘우리 가운데에 있는’ 하느님 나라를 알아보고 누릴 수 있어야 합니다. “지금 여기”에서, 내 삶의 자리에서, 나와 함께 살아가는 우리들 가운데에서 하느님을 만나야 합니다. 즉 사람들 안에 계신 하느님을 알아보고 만나야 한다는 뜻입니다. 귀찮은 일에 엮이는 게 싫다고, 손해보거나 상처입고 싶지 않다고 사람들은 피해 다니면서, 아무도 없는 골방에서 혹은 조용한 성당에서만 하느님을 만나려고 해서는 안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 말씀처럼 ‘서로 사랑하는’ 가운데 상대방 안에 내재해 계신 ‘그의 하느님’을 만나고 내 안에 모셔야 하는 겁니다. “지금 여기”에서 하느님을 만나야 한다는 말은 다른 한편으로 때와 장소를 가리거나, 상황이나 조건을 따지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하느님의 섭리에 따라 ‘지금 여기’에 같이 있는 이들 안에서 그분을 찾지 못하고, 내가 좋아하는 사람, 나에게 잘 해주는 사람에게서만 하느님을 찾는다면 그건 모든 것 안에 계시는 하느님을 ‘반쪽짜리’로 만드는 일입니다. 그렇기에 나와 함께 살아가는 이들을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내 안에 받아들이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렇게 해야만 하느님을 온전하게 내 안에 모실 수 있습니다.
* 함 승수 신부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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