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연중 제32주간 금요일] | |||
---|---|---|---|---|
이전글 | 오늘의 묵상 [11.15.금] 한상우 신부님 | |||
다음글 | 그날에 사람의 아들이 나타날 것이다. | |||
작성자박영희 | 작성일2024-11-15 | 조회수61 | 추천수2 | 반대(0) 신고 |
[연중 제32주간 금요일] 루카 17,26-37 “시체가 있는 곳에 독수리들도 모여든다.”
어제 복음이 ‘하늘나라’가 어떻게 올 것인지, 즉 종말의 ‘시기’에 대한 이야기였다면, 오늘 복음은 종말이 어떻게 진행될 것이며 그것을 어떻게 알아볼 수 있겠는지 그 ‘양상’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종말에 대해 이야기 할 때 그 시기와 양상이라는 두 가지 사항을 가장 궁금해하지요. 그 두 가지를 알면 자신에게 닥쳐올 재앙을 미리 대비하거나 최소한 피할 수는 있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종말은 사건이나 사고처럼 특정 시간에 특정 장소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사는 세상 전체에 걸쳐 일어나는 일이기에 그 시기와 양상을 미리 안다고 피할 수 있는게 아닙니다. 그렇기에 종말을 두려움 없이 맞이하려면, 종말이 내가 완전히 끝장나는 ‘파멸’이 되지 않게 하려면 종말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철저한 준비가 필요합니다.
이를 위해 예수님은 구약시대 ‘노아의 방주’ 사건을 예로 드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죄악과 탐욕이 만연한 세상을 홍수로 쓸어버리고 모든 것을 새롭게 시작하겠다는 마음을 품으셨지만, 그 계획을 ‘즉시’ 실행에 옮기지는 않으셨습니다. 인간들이 스스로의 잘못을 뉘우치고 회개하여 상황을 바로잡을 ‘유예기간’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모든 이가 회개할 수 없다면 최대한 많은 인원을 회개시켜 멸망으로부터 구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노아를 시켜 사람들과 동물들을 구원할 ‘방주’를 만들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노아가 방주를 완성할 때까지 몇 십년이라는 긴 시간을 기다려 주셨습니다. 즉 노아가 방주를 만드는 과정 자체가 하느님의 심판을 경고하는 표징이자, 죄인들의 회개와 구원을 바라시는 하느님의 자비를 드러내는 표징이라고 할 수 있는 겁니다.
하지만 방주는 결국 구원과 자비의 ‘표징’이 되지 못했습니다. 그것을 보는 사람들의 ‘믿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 믿음에서 나오는 ‘회개’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비 한방울 오지 않는 마른 날씨에 거대한 배를 짓는 노아를 비웃으며,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하는 세상의 일에만 전념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하느님의 경고 말씀을 무시하고 욕망과 집착에 빠져 세상 것들만 탐하다가 갑자기 닥쳐온 커다란 홍수에 휩쓸려 멸망하고 만 것이지요. 이 사실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노아의 방주 사건이 강조하는 건 ‘그들이 죄를 지어서 멸망했다’가 아니라, ‘그들이 평소에 종말을 위한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아서 멸망했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언제든 그들처럼 멸망할 수 있습니다. 죄를 짓지 않는 것으로 만족하며 하느님 뜻을 따르는 일을 나중으로 미룬다면, 그러면서 세속적인 이익과 즐거움만 쫓는다면, 종말은 어느 날 갑자기 닥쳐와 나를 파멸시키는 ‘재앙’이 되고 마는 겁니다.
예수님께서는 “시체가 있는 곳에 독수리들도 모여든다”고 하셨습니다. 시체의 썩은 냄새가 독수리라는 맹수를 끌어들이듯이, 죄를 짓고도 회개하지 않아 병들고 썩어가는 우리 영혼이 풍기는 영적 악취가 우리의 심판에 ‘멸망’이라는 맹수를 끌어들인다는 뜻입니다. 중요한 건 심판이 언제, 어디서 일어나는가가 아니라, 내가 그 심판을 어떤 마음자세로 어떻게 준비하는가이지요. 언제나 하느님 뜻에 깨어 준비하고 있으면, 그분 뜻을 실천하는 일을 나중으로 미루지 않고 ‘지금 여기에서’ 즉시 실천하며 살면, 언제 어디서 심판을 마주하더라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니 막연히 멸망이라는 독수리를 두려워하며 전전긍긍하기보다는, 그 독수리가 왜 나에게 날아오는지 그 ‘이유’를, 내 삶에 그 독수리가 꼬이지 않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 ‘방법’을 생각하며 그것을 실행해야 할 것입니다.
* 함 승수 신부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