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 구원을 얻을 그날 그 시각까지 / 연중 제33주일[세계 가난한 이의 날]나해 (마르 13,24-32)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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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박윤식 | 작성일2024-11-16 | 조회수69 | 추천수1 | 반대(0) 신고 |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구원을 얻을 그날 그 시각까지 / 연중 제33주일[세계 가난한 이의 날]나해 (마르 13,24-32) 오늘은 연중 제33주일이며 세계 가난한 이의 날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2016년 11월 ‘자비의 희년’을 폐막하며 연중 제33주일을 ‘세계 가난한 이의 날’로 지내도록 선포하셨다. 이날 교회는 가난한 이들을 위한 우선적 선택의 모범을 보여 주신 예수님을 본받아, 모든 공동체와 그리스도인이 가난한 이를 향한 자비와 연대, 형제애를 실천하도록 일깨우고 촉구한다. 사실 우리 신앙인에게는 영원한 생명을 주실 예수님에 대한 믿음의 확신과 그분 부활을 선포하며 주님의 가르침에 따라 살아갈 용기가 필요한 때이다. 세상 종말의 그 날과 그 시간은 그 누구도 모른다. 우리는 표징들을 통하여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를 놓쳐서는 안 될게다. 세상이 혼란스러울수록, 우리를 유혹에 빠뜨리려는 거짓 예언자들도 많아질 것이니까. “너희는 무화과나무 가지가 부드러워지고 잎이 돋으면 여름이 가까이 온 줄을 안다. 이처럼 너희도 이런 일들이 일어나면, 사람의 아들이 아주 가까이 온 줄 분명히 알아라. 이 세대가 지나기 전, 이 모든 일이 일어난다. 하늘과 땅은 사라질지라도 내 말은 사라지지 않으리라. 이렇게 그 날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신다.” 아무튼 모든 생명체는 언젠가 종말을 맞는다. 더군다나 내가 원해서 세상에 온 건 아닐지라도, 언젠가 이 세상에서 내 생명이 끝날 날이 올 것임은 안다. 살려는 욕구에 죽음을 두려워하고, 그 때를 궁금해 한다. 현대의학이 그 죽음의 세계를 해명하려 노력했지만, 죽음 너머를 분명히 알려 준 적은 없다. 이따금 죽음의 세계를 보았다는 이들의 체험 이야기가 여럿 있기도 하다. 분명한 것은 그것은 죽음 이전에 일어난 주관적인 이야기일 따름일 수도. 그렇다면 마지막 날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예수님께서는 죽은 이들이 다시 살아나리라는 믿음을 더해 주고자 이곳에 오셨다. 이는 우리에게 공포와 두려움을 주려는 것이 아닌, 믿음과 희망을 갖도록 이끌어 줄게다. 사실 종말이 다가올수록 가족이나 국가, 사회와 자연계에 이상 현상이 일어난단다. 기존질서의 변화는 물론, 실제로 달도 태양도 바뀐다나. 그러나 자신이 변화되면 어제 태양과 오늘 태양 은 달라지듯, 종말 역시 이러한 삶의 변화일 수도. 마음이 밝은 날에는 달의 아름다움이 느껴지지만, 마음이 어두운 날에는 별다른 느낌이 없듯이. 이는 각자 어떻게 살았는지의 결론이니까. 그러니 두려워하거나 무서워할 수 필요는 없다. 이는 자신이 가진 기분이기에. 그러기에 우리는 삶의 중간에서 그 종말의 처신을 지례짐작 판단할 수는 없다. 감정적인 무엇으로 해석할 수도 없다. 종말은 온전히 하느님께 속한 거다. 누가 인간 삶에 대해 결론을 내릴 수 있을지? ‘이렇게 저렇게’ 살아야 구원이 가능해진다는 건, 단지 우리만의 생각일 게다. 그래서 교회는 최후의 심판을 이야기한다. 새로운 시작이 종말을 위한 가장 확실한 준비이다. 예수님께서는 해와 달 등에 이변이 생길 때, 사람의 아들이 큰 권능과 영광 떨치며 구름타고 오시는 걸 볼 것이란다. 이는 그분께서 주실 구원을 위한 재림이라나.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오시는 그 마지막 날을, 구원의 날로 기쁘게 기다려야 한다. 따라서 비록 그 날과 그 시각은 모를지라도, 우리는 주위의 수많은 ‘작은 이’와 함께 기쁘게 그분 재림을 기다려야만 한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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