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반영억 신부님_영혼의 눈을 뜨게 해 주십시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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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최원석 | 작성일2024-11-18 | 조회수64 | 추천수2 | 반대(0) 신고 |
시력이 6.0인 사람도 있다고 합니다. 그는 아주 멀리 있는 것도 잘 봅니다. 그렇다고 그가 늘 행복한 것은 아닙니다. 볼 수 있다는 것이 행복이기도 하지만 볼 것, 안 볼 것 다 보면 마음은 오히려 힘들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외적으로는 잘 보지만 혹 자기 자신을 볼 수 없다면 그는 불행합니다. 육신의 눈이 중요하지만, 내면의 세계를 보는 마음의 눈은 더 소중하고 하느님 나라를 보는 영혼의 눈은 더욱더 고귀합니다. 우리는 감겨 진 영혼의 눈을 떠야 합니다.
어떤 눈먼 이가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는 소리를 듣고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루카18,38).하고 부르짖었습니다. 그런데 앞서 가던 이들이 그에게 잠자코 있으라고 꾸짖었습니다. ‘이웃사촌’이라 했는데 아무래도 눈먼 소경은 이웃을 잘못 만난 것 같습니다. 유다인들의 표현으로 자비라는 것은 애간장, 애타는 심정을 말합니다. 호세아서에서는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마음을 “내 마음이 미어지고 연민이 북받쳐 오른다”(11.8)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애간장이 녹는 안타까움! 이것이 바로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자비이며 사랑입니다. 눈먼 이는 바로 그 자비를 간절히 청했습니다.
절박한 부르짖음을 외면한 사람들은 아무리 좋은 눈을 가졌다 할지라도 마음의 눈은 뜨지 못했으니 정작 “주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외쳐야 할 사람은 눈먼 소경이 아니라 오히려 그 주변에 있던 사람들입니다. 이웃의 마음을 읽고 그의 부족함을 채워야 할진대 시끄럽다고 야단을 치고 있었으니, 그들이 소경입니다. 자비는 적선이 아닙니다. 함께하면 손해 볼 것 같아도 주님의 마음으로 함께 머무는 것입니다. 그의 필요를 절박함으로 함께하는 것입니다. 어려움이 있는 이들에게 형제애로 이웃이 되어줄 수 있을 때 그들을 통해서 주님을 만나게 됩니다.
눈먼 이는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붙잡으려는 심정으로 발버둥치듯이 그렇게 절박하고 간절하게 매달렸습니다. '잠자코 있으라'는 꾸짖음에 굴하지 않고 믿음을 가지고 외쳤습니다. “주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믿음은 군중이라는 장벽을 넘어서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믿음은 군중의 손가락질도 마다하는 예수님께 대한 일편단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믿음을 보시고 당신의 능력을 드러내 보이셨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눈먼 이는 다시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는 즉시 하느님을 찬양하며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하느님을 찬양하며 따랐다는 것은 단순히 외적인 눈만 뜬 것이 아니라 영적인 눈을 뜨게 되었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우리도 눈을 떠야 합니다. 믿음의 눈을 뜨면 세상이 달라 보이고 이웃의 요구를 알아볼 수 있습니다. 영혼의 눈이 뜨여, 내가 변하면 세상이 아름답습니다.‘잠자코 있으라’고 꾸짖기 전에 그의 처지와 절박한 마음을 공감하게 되고, 오히려 주님을 불러 세우고 주님께로 인도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눈을 뜨게 해 주십시오”하고 부르짖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영적인 시력을 키울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그리하여 나를 보고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찬양하게 합시다.
“착각하지 맙시다. 자선은 단순히 무엇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자선을 베풀 때 가장 큰 은총을 받는 이는 그 손을 내민 사람입니다. 그 순간, 주님의 시선으로 자기 자신을 바라보게 되는 은총을 받기 때문입니다”(프란치스코 교황).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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