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요즘 영성심리학을 전공하시는 수녀님과 메일을 주고 받는데 중요한 가르침을 하나 전하고자 합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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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강만연 | 작성일2024-11-19 | 조회수119 | 추천수1 | 반대(1) 신고 |
지금 외국에서 공부하시는 수녀님과 메일을 주고 받습니다. 이분을 어떻게 알게 됐고 또 이분이 어떤 분이라는 건 조금 밝힐 수 없는 점은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중요한 건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실제 살아가는 데 유익한 게 있다면 그 유익이 더 중요하기 때문에 제가 전하고 싶고 저만 알고 있기엔 너무 아까운 정보라 또한 이런 고통에 시달리는 사람들에게는 정말 유익한 정보라 이것도 영적자선에 해당하기 때문에 올려드립니다.
저는 있는 그대로 표현하는 건 조금 무리라고 생각해 본질을 훼손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에둘러 표현하겠습니다. 지금 제가 전하고자 하는 건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겪는 현상입니다. 제가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이라면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종교도 상관없다는 말입니다. 또 하나는 천주교로 범위를 좁히면 천주교에서 세례를 받은 사람은 모두 해당된다는 그런 의미도 담고 있습니다. 먼저 이 의미를 알아야 제가 전하고자 하는 의미가 좀 더 명확하게 이해가 될 것이라 그렇습니다.
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이것도 어쩌면 원론적인 이야기일 수도 있는데 일반적인 원론과는 조금은 다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데 혼자서는 살아가지 못합니다. 다른 사람들과 협력하거나 공동체를 이루거나 아무튼 다른 사람들의 도움을 받고 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렇게 해서 인류는 지금까지 생존해온 것입니다. 그렇다 보면 모든 사람들과 만나고 또 그런 환경에서 생활하다 보면 마찰이 생길 수 있고 의견대립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건 신앙생활이든 아니든 모든 인간의 단체엔 다 이런 모습이 있습니다. 이건 어쩔 수 없습니다. 지금 어떤 한 사람만을 두고 보겠습니다. 그 사람이 지금 그 모습으로 있는데에는 지금 그 시간까지의 시간 동안 그 사람이 살면서 직간접적으로 받은 환경에 의해 그와 같은 모습으로 남아 있는 것입니다. 사람은 이미 태어나면서부터 환경이 다릅니다. 또한 성장 배경도 다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전세계 사람의 지문이 다르듯이 마치 우리도 그 사람의 인격도 다 다르다는 것입니다. 흔히들 인격이라는 것은 배워서 형성되는 것도 있지만 살면서 환경 속에서 형성되는 게 아주 중요하다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흔히 사용하는 표현처럼 가정교육이 중요하다는 그런 일면도 담고 있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종교를 가진 세월만 약 30년이 됩니다. 몇 개의 종교를 거쳤고 또 20대부터 국가의 중요한 행사에서 큰 봉사도 하고 다양한 취미와 활동을 하면서 다양한 사람들과 접촉을 한 경험을 바탕으로 해서 신앙생활과 접목을 해서 생각해봐도 이건 맞다고 생각합니다. 어디를 가나 이상하게 항상 모든 사람들과 원만한 관계를 형성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한 사람들의 근본적인 원인은 지금까지 살아온 그 사람의 성장배경과 이해를 같이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 안에서도 이와 같은 개념으로 이해를 해야 자신이 상처를 받아도 그 상처가 작게 되거나 아니면 상처로 남기지 않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건 저번에 제가 옆본당 어느 신부님과의 면담성사에서 그 신부님께서 하신 말씀을 한번 올려드렸는데 그 신부님의 말씀과 일맥상통합니다. 최근에 모처럼 그 신부님의 강론을 들었습니다. 제가 며칠 전에 올린 뼈때린 강론이라는 제목으로 올린 글이 그 신부님의 말씀이었습니다. 그때 신부님께서 기대치를 낮추라는 것입니다. 수녀님께서 전하는 메시지를 단적으로 축약하면 이와 비슷합니다. 사실 이게 생각보다는 쉽지 않습니다.
뭐냐 하면 단적으로 표현해 신자라고 해서 다 똑같은 신자가 아니고 또한 성직자라고 해서 다 똑같은 성직자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여기서 성직자라고 한 말은 신부님을 상징한 것이 아닙니다. 이해를 돕고자 어떤 신분의 하나의 상징적인 의미로 표현한 것입니다. 이점 잘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한마디로 말해 사람은 지금 그 상태의 그 신분이 중요한 게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지금까지 그 사람이 살아온 환경이 그 사람의 인격이라든지 모든 게 영향을 미친 것이기 때문에 지금의 모습으로만 판단하면 그 사람을 이해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그 사람만의 고정관념으로 이런 생각을 한다고 가정해보겠습니다.
20년 성당을 다닌 일반 신자가 있습니다. 이런 신자를 보면 이 사람은 성당을 20년 다녔고 신앙생활을 그 정도 했으면 아무리 못해도 이 정도의 신앙의 인격은 있어야 한다고 하는 자기만의 어떤 관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만약 그 사람이 그 기준에 미치지 못하면 당연히 이런 판단을 하게 됩니다. 20년이나 성당을 다니고 하면서 신앙이 왜 그 모양이냐고 말입니다. 저도 사실 이런 생각과 가까운 생각을 하는 사람의 일종입니다. 하지만 이게 잘못됐다고도 할 수 없고 또 맞다고도 할 수 없는 딜레마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이 생각을 배제하는 습관을 가지지 않으면 다른 사람들과 완전히 독립해서 살아가면 모를까 어차피 함께해야 한다면 피할 수 없는 난관이라는 것입니다.
그럼 이 난관을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 게 그나마 가장 현명한 길일까 하는 게 문제입니다. 정말 아주 쉽게 표현하고자 하면 이게 이해는 너무 잘 되기 때문에 이처럼 쉬운 표현이 없을 것 같아 표현함을 양해바랍니다. 제가 언젠가 어떤 글에서도 표현을 한 적이 있습니다. 개는 개소리 하는 게 당연합니다. 또 멍멍하고 짖는 것도 당연합니다. 누가 개가 그런다고 해서 화를 내는 사람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걸 당연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흔히들 사람들 말도 말이 완전 엉뚱한 소리거나 천박한 소리를 하면 개소리 한다고 합니다. 이걸 잘 이해를 하면 현명한 신앙생활을 하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이걸 좀 더 다르게 해석한다면 그런 개소리를 하는 사람을 보면 그 사람의 영혼이 불쌍하다고 하는 측은지심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이라 이런 마음을 가질 수가 힘든데 잘 생각해보면 그 사람의 영혼이 불쌍한 것입니다. 사실 이렇게 생각하기만 한다면 우리가 상처를 받아도 들 상처를 받는다고 합니다.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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