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성 대 바실리오와 나지안조의 성 그레고리오 주교학자 기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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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박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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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25-01-02 | 조회수86 | 추천수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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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대 바실리오와 나지안조의 성 그레고리오 주교학자 기념] 요한 1,19-28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은 ‘하느님 나라’를 향해 길을 걷는 사람입니다. 우리를 하느님께로 인도하는 ‘양심’이라는 내비게이션에 따라 하느님의 뜻에 맞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식별해가며 한 발 한 발 나아가는 겁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올바른 식별을 방해하는 장애물들을 만나게 되기에 참 어렵지요. 그 장애물들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요?
먼저 ‘교만’이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느님과 같아지려는, 그분 자리를 차지하려는 교만 때문에 죄를 지었습니다. ‘욕심’이 있습니다. 아합 왕은 이미 드넓은 정원을 갖고 있으면서도 나봇의 포도밭 마저 빼앗으려는 탐욕에 빠져 죄를 지었지요. ‘게으름’이 있습니다. 어리석은 처녀는 게으름과 안일함 때문에 기름을 넉넉히 준비하지 않았다가 신랑을 마중나가지 못했고 혼인잔치에 문전박대를 당했습니다. ‘인색’이 있습니다. 자기 집 대문 앞에 누워있는 라자로에게 빵 부스러기 조차 베풀지 않은 인색함 때문에 부자는 죽어 지옥에서 불타는 고통을 받아야 했지요. ‘질투’가 있습니다. 사울 왕은 질투에 눈이 멀어 다윗이라는 충신은 물론 왕권까지 잃었습니다. ‘음욕’이 있습니다. 다윗 왕은 성적 욕망에 휘둘려 부하 장수의 아내와 부정을 저질렀을 뿐 아니라 부하의 목숨까지 빼앗았지요.
만약 이들이 하느님의 뜻을 올바르게 식별했다면 그런 큰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들이 올바른 식별을 하지 못한 것은 귀로 들은 하느님 말씀을 마음에 간직하지 않았기 때문이고, 마음에 간직한 하느님 뜻을 삶 속에서 실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재림하시는 심판 때에 그분 앞에서 부끄러움에 고개도 들지 못할 큰 잘못을 저지르고 후회하게 된 겁니다. 하지만 세례자 요한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하느님께서 마음에 담아주신 말씀을 고스란히 마음에 담아 간직했고, 마음에 간직한 말씀들은 철저히 실행에 옮겼습니다. 그랬기에 “당신은 누구요?”라는 질문에, 자신은 그리스도도 아니고 엘리야도 아니며 구약에서 예고한 참된 예언자도 아니라고 솔직하게 말할 수 있었습니다. 하느님 말씀을 마음에 품고 있지 않았다면 자신을 드높이고 싶은 교만에 휘둘려 “내가 그리스도다”라는 거짓 증언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 뜻에 비추어, 주님과의 관계 안에서 자신을 바라보았기에, 자신은 대단한 존재가 아니라 그저 하느님의 말씀과 뜻을 온 세상에 선포하는 그분의 ‘소리’일 뿐이라고, 자신은 구세주로 오실 그리스도의 종이 되기에도 합당치 않은 비천한 존재일 뿐이라고 담담하게 고백할 수 있었던 것이지요.
우리도 세례자 요한의 그런 점을 본받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 앞에서 자신을 내세울 수 있을 정도로 대단한 존재가 아니며, 당연히 그리스도도 아닙니다. 그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님이심을 굳게 믿으며 그분 뒤를 따라가는 ‘그리스도인’일 뿐이지요. 이 점을 마음에 분명히 새기고 하느님 말씀을 내 삶의 참된 기준으로 삼으며 따라야 엉뚱한 길에 빠지지 않습니다. 오늘 하루 하느님의 말씀에 비추어, 주님과의 관계 안에서 나 자신의 모습을 성찰해봐야겠습니다. 혹시 내가 그리스도가 아니라 나 자신을 드러내고 있지는 않은지,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섬기며 따르기보다 그분을 등에 업고 내가 주인이 되려고 하지는 않는지 찬찬히 돌아보며, 겸손과 순명의 허리띠를 질끈 동여매야겠습니다.
* 함 승수 신부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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