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주님 공현 대축일 다해] | |||
---|---|---|---|---|
이전글 | 엘리사의 매일말씀여행(요한 2,1-12 / 주님 공현 대축일) | |||
다음글 | 이수철 프란치스코신부님 -더불어(Together), 희망의 여정 “희망 |2| | |||
작성자박영희
![]() ![]() |
작성일2025-01-05 | 조회수105 | 추천수3 |
반대(0)
![]() |
[주님 공현 대축일 다해] 마태 2,1-12 “그들은 꿈에 헤로데에게 돌아가지 말라는 지시를 받고, 다른 길로 자기 고장에 돌아갔다.“
신학생 시절 가톨릭 대학교 국제 의료봉사단의 일원으로 몽골에 간 적이 있습니다. 중간에 몽골의 유명한 관광명소인 ‘테를지 국립공원’에 들렀었는데, 거기에서 보았던 밤하늘의 아름다운 풍경은 지금까지도 기억 속에 선명하게 남아 있습니다. 도시에 있을 때에는 달빛이, 별빛이 그렇게 밝은지 미처 몰랐지요. 그런데 전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캄캄한 벌판 한 가운데 서 있으니 달빛은 너무 밝아서 눈이 부실 정도였고, 하늘을 가득 채운 수많은 별들은 당장이라도 쏟아져 내릴 것처럼 밝고 아름다운 빛을 내고 있었습니다. 그 때 몽골에서 바라본 하늘과 지금 서울에서 바라보는 하늘은 같은 하늘일 것입니다. 그곳의 하늘에 있던 별들의 수효가 서울 하늘보다 더 많다거나, 몽골 하늘에 있는 별이 특별히 더 밝은 것도 아니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몽골 초원의 별이 더 밝게 보이는 것은 인공적인 다른 빛들이 없기 때문입니다. 서울과 같은 도시는 곳곳에 전등불이 밝혀져 있기에 그 빛에 눈이 가려 하늘의 별을 제대로 볼 수 없는 겁니다. 그러니 ‘별들이 쏟아져 내리는’ 아름다운 밤 하늘을 보고 싶다면, 다른 불빛이 없는 어두운 곳으로 가야만 합니다.
우리에게 구원의 빛을 비춰주시는 주님을 만나는 데에도 그와 같은 노력이 필요합니다. 우리 가운데에 계시는 주님을 제대로 알아보려면 값 비싸고 화려한 것들로 치장된 유흥가가 아니라, 소박하고 가난한 이들이 살아가는 삶의 자리로 찾아가야 하는 것이지요. 주님의 탄생을 알리는 별은 동방박사들만 비춰준 게 아니었습니다. 예루살렘에 사는 사람들은 밝고 화려한 세속의 빛에 눈이 멀어 그 별을 미처 알아보지 못했을 뿐인 겁니다. 반면 동방박사들은 자신이 속한 화려하고 부유한 대제국을 떠나 상서로운 별빛만 보며 따라갔기에, 가장 낮은 곳에서 태어나신 아기 예수님이 ‘주님’이심을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무슨 일로 수천 킬로미터나 되는 먼 길을 찾아왔느냐는 헤로데 임금의 질문에 동방박사들은 유다인들은 물론 온 세상의 임금으로 태어나신 분의 탄생을 알리는 ‘별을 보고 왔노라’고 답합니다. 그 별이 대단하고 특별해서 믿게 된 게 아니라, 먼저 갈구하고 일단 믿었기에 그 별이 하늘에 뜬 게 무슨 의미인지, 그 별이 누구를 가리키는지를 알아볼 수 있게 된 것이지요. 그에 비해 예루살렘에 사는 대사제와 율법학자들은 참으로 ‘등잔 밑이 어두웠’습니다. 메시아가 어디에서 태어나실지를 머리로 아는 지식에 머물렀을 뿐, 그분을 뵙기를 갈구하지도 그분을 직접 찾아나서지도 않았기에 지척에서 태어나신 구세주를 알아보지 못한 겁니다.
천신만고 끝에 상서로운 별의 종착지에 도착한 동방박사들은 그 별 아래에 있는 집에 들어가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있는 아기를 보고 땅에 엎드려 경배’하였습니다. 여기서 ‘경배하다’라고 번역된 그리스어 동사는 ‘프로스퀴네오’인데 이를 직역하면 ‘~앞에서 무릎을 꿇다’라는 뜻이지요. 누군가의 앞에서 무릎을 꿇고 찬미를 드린다는 건 그가 나의 ‘주인’임을 인정한다는 표시입니다. 동방박사들은 그저 겉으로만, 눈에 보이는 행동으로만 주님을 경배한 ‘척’ 한 게 아니라 온 마음과 정성을 담은 선물로 ‘주님’께 대한 자기들의 믿음을 드러냈지요. 그들은 소중하게 챙겨온 보물상자를 열고 그 안에 담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주님께 ‘예물’로, 즉 감사와 찬미의 마음으로 기꺼이 내놓는 순수한 봉헌물로 바쳤습니다. 황금은 소유하고 있으면 세상에서 원하는 모든 걸 할 수 있는 귀한 재물입니다. 그렇기에 그 황금을 예수님께 봉헌한다는 것은 그분을 나의 ‘주님’으로 인정한다는 뜻이 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믿고 따르며 그분께서 나를 통해 원하는 일을 하시도록 자신을 봉헌하면, 주님께서 우리에게 더 큰 은총과 축복을 베풀어 주십니다. 유향은 오직 하느님께만 올리는 향기로운 제물입니다. 그렇기에 유향을 예수님께 봉헌한다는 것은 그분께서 ‘참 하느님’이심을 인정하는 일이 되지요. 주님은 당신을 하느님으로 믿고 따르는 이에게 무한한 능력을 드러내십니다. 몰약은 죽은 이를 염할 때 쓰는 약품입니다. 그렇기에 몰약을 예수님께 봉헌한다는 것은 내가 죽을 수 밖에 없는 부족하고 약한 인간임을 생명의 주인이신 분 앞에서 겸허하게 인정하는 일이 되지요. 주님은 그런 이에게 영원한 생명을 선물로 주십니다.
그러면 우리는 구세주로 오시는 그분께 어떤 예물을 드려야 할까요? 우리가 주님께 드릴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은 그분께 대한 믿음을 바탕으로 하느님 보시기에 ‘좋은’ 모습으로 변화된 자기 자신입니다. 그러니 주님 말씀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따르는 순명의 예물을 바쳐야겠습니다. 날마다 꾸준한 자기성찰과 통회, 그리고 변화되려는 노력으로 이어지는 회개의 예물을 바쳐야겠습니다. 하느님 나라에서 누릴 영원한 생명에 대한 희망으로 지금 여기에서 그분의 사랑과 자비를 행동에 옮기는 실천의 예물을 바쳐야겠습니다. 주님께서는 이제 더 이상 밤하늘에서 반짝이는 별빛으로 우리를 인도하지 않으십니다. 당신 말씀과 가르침을 통해 드러나는 진리의 빛으로 우리를 비추시며 우리가 그 빛을 따라 걷기를 바라십니다. 우리가 구원의 빛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데에 그치지 않고, 굳건한 믿음과 착한 행실로 이루어진 ‘신앙의 빛’으로 다른 이들을 비추어 그들을 하느님께 대한 참된 믿음으로 이끄는 사도가 되기를 바라십니다.
경배를 마친 동방박사들은 꿈에 헤로데에게 돌아가지 말라는 지시를 받고 ‘다른 길’로 자기 고장에 ‘돌아갔’습니다. ‘유다인의 임금이 될 아기를 찾거든 나에게 알려달라’는 헤로데 임금의 부탁을 들어주는 것보다는 하느님의 뜻에 순명하는 편이 옳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살다보면 동방박사들이 그랬던 것처럼 세상의 뜻과 하느님의 뜻 중 한쪽을 따라야 하는 선택의 순간을 수도 없이 마주하게 되지요. 하느님의 뜻을 선택하여 따르는 것이 옳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다 알 정도로 분명하지만, 문제는 현실적으로 그런 선택을 하기가 어렵다는데에 있습니다. 지금 당장은 세상의 가치기준에 부합되는 쪽을 택하는 것이 자신에게 더 큰 이득이 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하느님의 뜻을 선택하기 위해서는 익숙하고 편한 기존의 방식을 포기하고 아직 잘 몰라서 불안한 방식을, 더 힘들고 어려워서 불편한 방식을 감수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동방박사들이 하느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 이스라엘에 올 때와는 ‘다른 길’로, 더 멀리 ‘돌아서’ 간 것처럼 말이지요. 그러나 세상의 뜻보다 하느님의 뜻을 더 중요하게 여기며 따르는 것이 그리스도 신앙인의 소명입니다. 그러기 위해 어렵고 힘든 길로 돌아서 가는 수고를 마다않고 행하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신앙생활입니다. 구원은 하느님을 위해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이들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기 때문입니다.
* 함 승수 신부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