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주님 공현 대축일 후 수요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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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조재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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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25-01-07 | 조회수260 | 추천수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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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안에 자녀가 태어나는 것은 하느님의 축복입니다. 안타깝게도 태어나면서 부모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자녀가 있습니다. 유전자의 결함으로 선천적으로 장애를 가지고 태어나는 아이가 있습니다. 태어나면서부터 큰 수술을 몇 번씩 해야 하는 아이도 있습니다. 부모님은 처음에는 이런 의문을 가진다고 합니다. ‘왜 내게! 이런 일이!’ 아이로 인해서 경제적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이 되기도 하고, 정상적인 생활이 어렵게 되기도 합니다. 이렇게 힘들고 어려운 시간을 보내면서 가정의 화목이 깨지기도 합니다. 어떤 분은 죄책감에 고개를 들지 못하기도 하고, 어떤 분은 분노에 하느님을 원망하기도 합니다. 저는 그런 분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태어나면서 심장 판막 수술해야 했던 아이, 태어나면서 신체의 일부가 없었던 아이, 태어나면서 뇌에 이상이 있었던 아이도 보았습니다. 육체의 병은 치료하고 고칠 수 있지만, 평생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만 살 수 있는 유전적인 결함이 있는 아이도 있습니다. 제가 아는 자매님은 아들이 두 명입니다. 한 명은 보통 아이들과 같았습니다. 잘 자라주었고, 직장 생활도 열심히 하면서 결혼해서 자녀를 두었습니다. 그런데 다른 한 명은 보통 아이들과 달랐습니다. ‘다운 증후군’ 아이로 태어났습니다. 자매님은 그 아이를 ‘하느님의 선물’이라고 이야기합니다. 하느님의 선물이 잘 자랄 수 있도록 달라스 지역에 장애인 학교를 찾아갔습니다. 그곳에서 임원이 되었고, 장애인 학생들이 좋은 환경에서 교육받을 수 있도록 온 힘을 다하였습니다. 본당 자선 음악회 수익금도 자매님의 요청을 받아들여 장애인 학교에 기부하였습니다. 장애인 학교에는 자매님처럼 하느님의 선물을 받은 부모님들이 있었습니다. 모두 기쁘고, 당당하게 아이들이 잘 자랄 수 있도록 길을 만들고 있었습니다. 역시 하느님의 선물을 받은 목사님도 열정을 다해서 장애인 학교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자매님은 ‘꿈’이 있습니다. 아이들을 위한 집을 마련하는 겁니다. 정부의 지원과 후원금으로 이 학생들이 언젠가 부모님들이 없어도 모두 행복하게 지낼 수 있도록 집을 마련하고 싶다고 합니다. 하느님께서 선물 주셨으니, 마땅한 길도 마련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복음에서 보면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베드로 사도가 호수 위를 걸을 때였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그만 두려움에 빠졌고, 물속으로 빠져들어 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사도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왜 두려워하느냐?” 그리고 오늘도 말씀하십니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그러고 나서 그들이 탄 배에 오르시니 바람이 멎었다. 그들은 너무 놀라 넋을 잃었다. 그들은 빵의 기적을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마음이 완고해졌던 것이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풍랑을 잠재우시고, 호수 위를 걸으시는 분이심을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걱정과 근심이 앞선 사람은 컵에 남은 반 잔의 물을 보고 이렇게 생각합니다. ‘물이 반밖에 남지 않았네.’ 그러나 희망과 용기를 가진 사람은 컵에 남은 반 잔의 물을 보고 이렇게 생각합니다. ‘아직 반이나 남았네.’ 컵에 남은 물은 변함이 없습니다. 다만 내 생각에 따라서 그 물은 걱정덩어리가 되기도 하고, 갈증을 풀어주는 희망이 되기도 합니다. 꽃이 지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다면, 우리는 언젠가 본향으로 가는 존재임을 자각한다면 이 세상에서의 두려움과 걱정은 나를 영적으로 풍요롭게 하는 ‘디딤돌’이 될 수 있습니다. 진화의 긴 터널을 지나면서 우리의 몸은 ‘두려움’을 기억하게 되었습니다. 연약한 인간을 압도하는 것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자연재해, 사나운 동물, 독이 있는 벌레, 먹으면 죽을 수 있는 식물, 추위, 배고픔, 병, 폭력, 전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것들을 이겨내고, 피하고자 인간은 두려움을 기억하였던 것입니다. 그런 두려움은 인간의 지혜와 협력으로 하나둘씩 해결됐습니다. 지금, 진화의 피라미드에서 인간은 다른 모든 생물에게 두려움의 대상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에게는 또 다른 차원의 두려움이 있습니다. ‘걱정, 근심, 불안, 초조’와 같은 것들입니다. 내가 걱정, 근심, 두려움, 초조와 불안으로 가득 차면 내 몸도 그렇게 움직이기 마련입니다. 아무리 좋은 체격을 가졌어도, 많은 배움이 있어도 그것들은 무기력하게 되고 맙니다. 하지만 내가 사랑, 희망, 믿음, 온유함과 친절로 가득 차면 나의 몸 또한 그렇게 움직이기 마련입니다. 비록 건강하지 못해도, 많은 배움이 없어도 얼마든지 하느님의 복음을 선포할 수 있습니다. 오늘 독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쫓아냅니다. 두려움은 벌이 관련되기 때문입니다. 두려워하는 이는 아직 자기의 사랑을 완성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시고, 물 위를 걸으셨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빵 공장을 세우고, 수상 스키를 타라는 뜻은 아닙니다. 눈에 보이는 형제들을 사랑하라는 뜻입니다. 하느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라는 뜻입니다. “어둠 속을 걷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암흑의 땅에 사는 이들에게 빛이 비치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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