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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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최원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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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25-01-09 | 조회수72 | 추천수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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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과 독서에서 주님이 말씀하시고자 하는 바는 주님의 출현을 공식적으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억압 받는 사람이 해방을 맞이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러면 주님은 왜 오셨을까? 그 질문을 요번 성탄을 맞이하여서 알게되었습니다. 성탄을 맞이하면 어둠과 빛에 대한 것입니다. 어둠이 사람이라면 빛은 하느님입니다. 그 하느님이 우리 인간의 모습으로 오셨다는 것입니다. 만일 인간의 모습으로 오시지 않았다면 인간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로 지옥과 같은 삶을 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으로 인해서 인간은 억압으로 부터 해방을 맞이 한 것입니다. 억압은 어느 정치적인 식민지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은 죽음의 문화에 큰 압박을 받고 죽음으로 인해서 사람들은 자신의 본질을 알아가지 않고 짐승과 같이 죽어 간다는 것입니다. 죽음의 공포로 인해서 사람들은 그 본질적인 자아를 알아 보려고 하지 않고 짐승과 같이 살아갑니다. 그래서 지배와 피지배라는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동물의 본성이 이기고 지는 것으로 규정을 짖고 수없이 그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결국은 그것으로 끝이 나는 구조입니다. 하지만 주님의 출현으로 인해서 우리는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고 우리의 끝은 하느님의 나라에서 영생을 얻는 다는 것을 알고 있고 그 삶을 우리 현실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것을 정확히 알 수 있는 것과 느낄 수 있는 것이 우리 신부님들의 묵상글을 읽으면서 나름 영생의 길로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저는 많이 부족하지만 그러나 묵상 안에서 주님의 영적인 세상으로 넘어가는것을 알 수 있습니다. 죽음의 장막에서 해방되어 있다 보니 우리는 해방되어 있고 사랑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죽음의 장막을 넘어갈 수 있는 것은 하느님 사랑 안에 있으면 됩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구체화 할 수 있는 것이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인간이면서도 하느님입니다. 그래서 그분을 사랑하면 우리는 영생으로 넘어갈 수 있습니다. 영생은 하느님 사랑 안에 있고 그 사랑은 우리 이웃 사랑안에 있습니다. 구원은 구체적인 행동이 따라야 합니다. 그 행동은 하느님 사랑이고 그리고 이웃 사랑입니다. 눈에 볼 수 없는 하느님을 만날 수 있는 길은 사랑 안에 머물면 그 안에서 하느님을 만나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안에 해방이 있습니다. 아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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