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 부름에 즉시 버리고 곧바로 따르도록 / 연중 제1주간 월요일(마르 1,16-20)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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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박윤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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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25-01-12 | 조회수146 | 추천수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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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부름에 즉시 버리고 곧바로 따르도록 / 연중 제1주간 월요일(마르 1,16-20) ‘“때가 차서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그리고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호수에 그물을 치는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아를 보시고는 이르셨다. “나를 따라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이가 되게 하겠다.” 그러자 그들은 바로 그물을 버리고 따랐다. 예수님께서 더 가시다가, 그물을 손질하는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을 보시고 그들을 부르셨다. 그러자 그들은 아버지 제베대오를 삯꾼들과 함께 배에 버려두고, 그분을 따라나섰다.’ 연중시기 첫날인 오늘, 예수님께서는 마음먹으신 일을 실행하시고자 제자들을 부르신다. 시몬과 야고보의 형제다. 길 가시다가 우연히 부르신 게 아닌, 이전부터의 만남이 있었을 수도. 그들은 그물과 부모님마저 버리고 따랐다. 요한 형제를 부르시는 대목은 놀랍다. 그들은 아버지 제베대오를 삯꾼들과 함께 배에 버려두고 따라나섰단다. 말하자면, 옷 입은 그대로 예수님을 따라갔다는 거다. 정말로 그랬을까? 기다렸다는 듯이 만사를 내팽개치고는 따라 나선 것일까? 그건 아닐 게다. 주님의 첫 제자들이 무책임하게 그런 식으로 마냥 따랐을 리 없었을 게다. 즉시에 버금가는 ‘곧바로’라는 말이 있다. 예수님께서 시몬 형제를 부르실 때 그들은 곧바로 응답했고 야고보 형제를 부르실 때도 그들 역시 곧바로 그물을 버렸다. 우리는? 혹시 ‘다음에, 여건이 되면’ 등 미루는 건 아닐지? 예수님께서는 지금 여기서도 가까이 다가오라고 순간순간 우리를 부르신다. 이에 미적거릴 때에 그 부르심에 담긴 소중한 그 무엇을 놓치는 건 아닐까? 사실 그 옛날 갈릴래아 호숫가의 그 형제들도 모르긴 몰라도 수도 없이 망설였으리라. 갈지, 말아야 할지를 생각하고 또 생각했으리라. 하지만 그 모든 건 생략되어 입에도 벙긋하지 않았다. 주님을 따르려면 즉시 아닌 곧바로 응답해야 한다는 걸 알리기 위해서일 게다. 우리는 그분을 따르면서, 너무 많은 걸 저울질하는 게 아닌지를 뒤돌아봐야만 하리라. 예수님의 복음 선포는 이천 년 전에 한 번 있었던 지난 일이 아닌 지금 여기서도 우리에게 선포되고 있으니까. 오늘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고기 잡던 어부들에게 당신을 따르라고 하신 예수님의 그 말씀은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 또한 부르시는 것이다. 그들은 그들의 생계 수단인 그물과 배를 버리고 마지막에는 그들의 아버지까지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랐다. 그들이 버린 것은 자신의 생계 수단만이 아니다. 또 그들은 어떤 일이 일어날지도 모르는 미지의 삶에 자신의 모든 것을 던졌기에 자신이 가지고 있는 물질뿐 아니라 자기 자신을 기준으로 하는 삶 또한 내려놓았다. 이제 제자들은 소유의 삶이 아니라 존재의 삶을 선택했다. 소유욕에 따른 소비보다 존재로 나타나는 나눔의 삶, 하느님 나라의 복음의 삶을 택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은 영성가들과 기도하는 이들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삶이다. 우리도 제자들처럼 모든 두려움, 걱정, 인간적인 나약함을 내려놓고, 예수님 말씀을 따르는 제자들처럼 그분만을 믿는 신앙인이 되어야 하리라. 연중시기의 첫날이다. 오늘도 주님께서는 속세의 삶에서 미적거리는 우리를 애처롭게 부르신다. 지금 이 부르심은 그 옛날 그 호숫가의 뱃사람 마냥 배와 그물마저 버리는 그것과는 감히 비교가 안 된다. 더구나 부모자식마저 담쌓는 그 결단은 결코 아니다. 따르면 다 주실 그 부름에 즉시 버리고 곧바로 달려가자. 이제는 내가 사는 게 아닌 예수님께서 내 안에 사시기에.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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