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예수고난회 김준수 신부님의 주님 봉헌 축일: 루카 2, 22 - 40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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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이기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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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25-02-01 | 조회수108 | 추천수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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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주님 봉헌 축일이며, 특별히 금년은 ‘한국 교회 축성 생활의 해’를 기념하면서 축성된 남녀 수도자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날이기도 합니다. 오늘 강론은 봉헌 축일에 적절한 이야기로 시작하렵니다. 프랑스 파리의 어느 성당에서 봉헌 축일을 맞아 어려운 이웃을 위한 헌금을 하는 중이었습니다. 우리나라는 그렇지 않지만, 서양에서는 봉헌 바구니를 돌릴 때 만약 큰돈을 가졌는데 적게 내고 싶으면 봉헌 바구니 안에 큰돈을 놓고 잔돈을 거슬러 갈 수도 있다고 합니다. 자기 형편대로 그리고 자기가 하고 싶은 만큼 하는 것은 흉이 되지 않기 때문이지요. 아무튼 그 봉헌 바구니가 어느 눈먼 사람 앞에 멈추었습니다. 그 사람은 주변의 사람들도 잘 아는 사람으로 단 1유로도 헌금할 수 없는 형편의 가난한 사람이었지요. 그런데 자그마치 27유로를 접시에 세어서 놓는 것이었습니다. 깜짝 놀란 옆 사람이 “당신이 어떻게 그 많은 돈을?” 하고 묻자, 눈먼 사람은 웃으며 이렇게 말하더래요. “저는 눈이 안 보이지요. 그런데 제 친구에게 물어보니 저녁때 불을 켜는 비용이 일 년에 27유로가 든다고 하더군요. 나는 불을 켤 필요가 없으니 일 년이면 이만큼의 돈을 저축할 수 있겠구나, 생각하고 모은 거죠. 그래서 예수님을 몰라 어두운 곳에 있는 어려운 이웃들에게 참 빛이 비치도록 하고 싶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 봉헌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 보도록 합니다. 자기에게 쓰고 남은 것만을 봉헌해야 한다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우리, 그러다 보니 제대로 된 봉헌을 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늘 부족하다는 마음을 갖고 있기 때문이지요. 특별히 오늘은 주님 봉헌 축일이고, 축성 생활의 날이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율법에 기록된 대로 성전에서 봉헌되셨다고 전해 줍니다. 그런데 교회는 주님 봉헌 축일을 2월 2일로 지냅니다. 어떤 의미일까요? 40은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가나안에 이르기까지 광야에서 떠돌던 그 40년이고, 주님께서는 광야에서 유혹받으신 그 40일입니다. 이 40은 시련과 정화의 과정을 거치는 기간이고 이 과정을 거쳐 아버지에게서 오신 주님께서 다시 아버지께 돌아가시는 기간입니다. 그러므로 40일의 첫날인 주님의 성탄은 주님께서 하늘에서 세상으로 봉헌되심을 뜻하는 것이라면, 40일의 마지막 날인 주님의 봉헌 축일은 주님께서 십자가 위, 즉 이 세상에서 하늘로 봉헌되심을 뜻하는 것이고, 주님의 성탄이 하늘의 성부께서 아드님을 이 세상에 봉헌하신 것이라면, 주님의 봉헌은 지상의 부모가 아드님을 성부께 봉헌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첫 번째 주님 봉헌은 육화의 봉헌입니다. 하느님께서 당신 아들을 우리에게 봉헌하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세상 가운데로, 우리 가운데로 들어오신 것입니다. 두 번째 주님 봉헌은 십자가 희생, 수난의 봉헌입니다. 주님께서 성부께 순종하여 우리를 위해 당신 목숨을 바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주님 봉헌의 축일에 시메온은 어머니 마리아에게 아주 섬뜩한 예언을 합니다. 장차 예수님을 하느님께 봉헌한 마리아는 장차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영혼이 예리한 칼에 찔릴 것이라고 합니다. 물론 주님은 육화와 수난의 두 봉헌을 통해 세상의 빛이며 구원자로 세상을 밝히시겠지만, 그 빛 가장 가까이 서 계신 어머니 마리아는 등잔 밑이 상대적으로 묵직하고 어두운 아픔을 겪게 되실 것입니다. 이런 배경에서 교회는 모든 남녀 수도자의 삶이 다른 이들에게 빛이 되길 바라면서 봉헌의 날로 제정하였습니다. 그래서 오늘 많은 수도회는 이를 기억하면서 서원식을 통해서 주님의 이 봉헌을 본받아 자신을 하느님께 바칩니다. 수도 생활을 축성 생활이라 칭함은 아마도 수도 생활의 본질이 바치는 데 있음을 간접적으로 시사하는 것이다, 라고 생각합니다. 바치는 삶, 비우는 삶, 결국 자신은 없어지는 삶이 수도 생활이란 말입니다. 축성 생활의 날을 맞이하면서 수도자인 저는 무엇을, 얼마나 주님께 바쳐드리고 살아왔는지 반성해 봅니다. 저의 서원 생활을 되돌아보면서, 과연 내 삶이 바치는 삶이었는가? 끝없이 비우는 삶이었는가? 끝없이 자신을 죽이는 삶이었는가? 수도 생활에 입문할 무렵, 되돌아보니 그땐 참으로 순수했습니다. 사도 베드로처럼 예수님을 위해서라면 목숨까지도 바칠 기세였습니다. “나에게는 그리스도가 생의 전부입니다.”라는 사도 바오로의 고백이 저의 삶인 듯 여겼습니다. 그렇게 오랜 세월이 흔적 없이 흘러가는 강물처럼 흘렀습니다. 예전 아홉 분의 수녀님들이 저희 수도회에 오시어 미사를 함께 봉헌하면서 지난 한 해를 되돌아보고, 서원 갱신을 하셨습니다. 이 예식을 하고 난 뒤 수녀님들은 자신들의 수도 생활에 대해서 나누는 귀한 시간 가졌습니다. 어느 수녀님은 지난 수도 생활을 되돌아보면 부족하고 부끄러운 삶을 살아온 듯싶어서 하느님 앞에 한없이 초라하고 부끄럽기 그지없다고 하더군요. 과거 저 역시 그런 느낌이 들었지만, 지금은 어떤 삶도 잘못된 삶이나 부끄러운 삶은 없다고 느낍니다. 잘 살았는지 못 살았는지 판단은 하느님께서 하실 것이며 다만 얼마큼 충실했는가 충실하지 않았는가를 되묻고 충실히 살면 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우리가 하느님 앞에서 잘 살면 얼마나 잘 살겠습니까? 어떤 누구인들 걸어온 길을 되돌아보면 직선이라기보다 곡선이었을 것입니다. 곡선을 직선으로 바꿔주시는 분은 바로 주님이시기에 주님 앞에 도달할 때까지 충실히 살면서 자신을 있는 그대로 내어 드리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사람들의 눈에는, 또 자기의 생각으론 저 많은 부끄러움이나 후회스러움은 하느님의 눈에는 전혀 후회스럽지 않고 부끄럽지도 않게 보실 것입니다. 다만 필요한 것은 항구한 충실성과 기다림이라고 봅니다. 수도자들에게 오늘 예수님께서는 두 노인을 축성 생활의 이정표로, 또 다른 새 출발의 표지로 세워주십니다. 그들이 바로 예루살렘의 시메온과 한나입니다. 그들은 기다림의 사람이었습니다. 신앙은 하느님의 뜻이 드러날 때까지 충실히 기다리는 것이다, 라고 생각합니다. 다들 메시아를 기다리다 지쳐 포기하고 말았는데, 다들 내 나이에, 내 주제에 메시아는 무슨, 하고 절망의 세월을 보내다가 세상을 떠났는데, 그들만큼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기다리고 또 기다렸습니다. 숱한 사람들이 끝내 구원의 빛을 보지 못한 채 이 세상을 하직했는데, 그들은 끝까지 희망을 버리지 않고 ‘때’를 기다리고 또 기다렸던 것입니다. 시메온은 그런 기다림 끝에, 마침내 부모의 팔에 안겨 성전 안으로 들어오시는 메시아 하느님을 뵙는 일생일대의 행운을 잡게 됩니다. 과분하게도 하느님을 자신의 두 팔에 안아보는 기쁨을 누립니다. 그 기쁨이 얼마나 컸었던지 시므온 예언자는 이렇게 외치고 있습니다. “주님,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이 종은 평안히 눈감게 되었습니다. 주님의 구원을 제 눈으로 보았습니다.” 한평생 오로지 주님께만 희망을 두며 주님께만 충실했던 시므온 예언자였기에 주님께서는 그에게 주님을 직접 눈으로 뵙는 기쁨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또한 한나 역시 무려 60년 가까이 성전을 떠나는 일 없이 단식하고 기도하며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기는 봉헌 생활을 해오신 결과, 자기의 눈으로 하느님을 뵙게 되었습니다. 시메온과 한나처럼 끝까지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자리에서 항구하게 충실히 살아가는 봉헌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상상을 초월하는 하느님의 상급이 따르기 마련입니다. 그 열렬한 기다림을 바탕으로 우리는 하느님 사랑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인내 끝에 우리는 하느님의 자비가 얼마나 큰 것인지, 그분 사랑이 얼마나 감미로운 것인지를 제대로 깨달을 수 있습니다. 결국 신앙생활, 수도 생활, 축성 생활의 핵심은 충실성이며 지속성입니다. 지금 삶의 자리가 어디인지가 아니라 주어진 삶의 자리에서 각자에게 맡겨진 삶을 통해서 주님처럼, 성모님처럼 우리 역시도 봉헌의 삶을 살아야겠지요. 수도자만 주님의 봉헌을 본받아야 한다면 굳이 교회 전체 축일로 오늘을 지낼 이유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봉헌해야겠습니까? 주님께서 하신 대로입니다. 봉헌의 참된 의미를 실제로 보여 주신 주님의 빛을 받고 세상 가운데로 다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어진 삶의 자리에서 촛불이 자신을 희생해서 불을 밝히듯이, 세상을 밝히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자신의 촛불을 함지나 침상 밑에 두지 않고 자기의 삶을 통해서 어두운 주변을 비추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에 속한 사람이 아니고 하느님께 속한 사람입니다. 그러기에 세상 가운데 살아가지만, 그리스도인은 세상을 닮아서는 아니 됩니다. 마치 연꽃이 흙탕물에 피지만 결코 그 물에 잠기는 법이 없이 세상에 아름다움과 향기를 풍기듯이, 우리도 하느님께 속한 사람이고 봉헌된 사람으로 세상을 복음화하되 자기가 세속화되는 일 없이 세상 한 가운데서 복음의 향기를 풍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연등처럼 어둠을 비추는 작은 촛불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 뜻으로 교회는 오늘 1년 동안 쓸 초를 축성하는 것입니다. 축성된 초를 받아 들고 집으로 돌아가 매일 그 초를 켜고 기도를 드림으로써 먼저 자신을 성화하고 또한 자신이 이 초와 같이 세상을 밝히겠다, 고 다짐을 하는 것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여러분이 아시는 수사님과 수녀님을 기억하시면서 기도해 주길 바랍니다. 그 옛날 예수님께서 자신을 성전에 봉헌하시고 마침내 십자가상의 봉헌으로 봉헌 생활을 완성하셨듯이 모든 수도자도 자신의 서약으로 봉헌한 삶을 통해 끊임없이 비우고 버리고 바쳐드리는 삶을 통해 세상의 빛으로 살아가도록 기도해 주십시오. 저 또한 이 미사 안에서 해외에서 활동하고 계시는 모든 수도자를 기억하고 기도드립니다. 더욱더 봉헌의 삶, 아름다운 비움의 삶에 정진하길 바라며 저희에게 빛을 비추어 주길 바랍니다. 저는 이 아름다운 성소로 불러 주신 주님께 오늘 하루 질퍽하게 감사를 드리며, 동반하고 있는 모든 신자분 모두에게 감사합니다. 특별히 오늘 복음에서 가장 눈에 뜨이는 것은 봉헌하신 부모님과 봉헌된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토라의 후대 작품인 탈무드에서는 자녀는 부모의 소유가 아니고 하느님의 소유이며 부모에게 잠깐 맡긴 것으로 설명합니다. 이 정신은 구약의 토라에서 비롯되어 맏자식을 하느님께 봉헌하는 것입니다. 성가정의 부모님이신 성요셉과 성모 마리아의 위대하심은 율법 전통에서 아드님 예수를 봉헌하셨지만, 중요한 사실은 그분들은 진정한 본보기는, 하느님의 것을 자기 소유라 취급하지 않고 하느님의 것을 하느님께 돌려 드리는 신앙의 자세에 있다고 봅니다. 이런 점에서 모든 봉헌의 삶을 살아가는 분들의 뒤에는 자식을 자신들의 소유라 여기지 않고 기꺼이 하느님께 봉헌하신 부모님이 있다, 는 사실을 잊지 말기 바라면 여러분들 또한 그런 신앙의 정신으로 자녀들을 봉헌하길 바랍니다. “주님, 제 눈이 주님의 구원을 보았습니다. 아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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