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 지금 바꾸어야 풍성한 은총의 기쁨을 / 연중 제4주간 수요일(마르 6,1-6)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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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박윤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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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25-02-04 | 조회수98 | 추천수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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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지금 바꾸어야 풍성한 은총의 기쁨을 / 연중 제4주간 수요일(마르 6,1-6) 불교 선종에서 중요한 인물이 마조 선사이다. 도 터득한 그가 잠시 고향에 들렀는데, 이웃 한 노파가, “무슨 대단한 양반이 와 이렇게 소동났나 했더니, 바로 쓰레기 청소부 마씨 아들 녀석 왔구먼!” 하더라나. 고향 할머니는 세월이 변하였는데도 어린 시절 그 꼬마로만 여긴 거다. 이에 마조는 반 장난, 반은 감상적으로 그 유명한 시를 읊었다. ‘권하거니 그대여 고향엘랑 가지 마소. 고향에선 누구도 성자일 수 없으니, 개울가에 산 그 노파, 아직도 내 옛 이름만 부르네!’ ‘안식일 예수님께서 나자렛에서 가르쳤는데, 많은 이가 놀랐다. “저 이는 어디서 저 기적들이 일어나다니! 저 이는 목수로 마리아의 아들이 아닌가? 그의 누이들도 우리와 여기에 사는데?” 그러면서 못마땅하게 여겼다.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친척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그리하여 그곳에서 몇몇 병자를 고치시고는 아무 기적도 일으키실 수 없었다. 그리고 믿지 않는 것에 놀라시고 여러 곳을 도시면서 가르치셨다.’ 예수님께서 카파르나움에 계셨다가 이제 안식일에 고향 회당에서 가르치시는 모습이다. 그런데 두 지역 비슷하지만 묘한 대조다. 두 회당에서 모두 놀라지만 그 이유는 다르다. 카파르나움에서는 율법 학자들과 달리 권위 가진 것에 많은 이가 놀라지만, 고향에서는 자기들과 별반 차이 없다고 생각하는 마을 분들에 대해 예수님께서 몹시 놀라시는 것이다. 카파르나움에서는 율법 학자들이, 고향 나자렛에서는 오랜 안면을 가진 분들이 예수님을 못마땅하게 여긴 거다. 이 놀람 끝도 대조적이다. 카파르나움에서는 예수님께서 더러운 영을 쫓아내셨는데, 정작 고향 나자렛에서는 몇몇 이들의 기적은커녕 치유정도 베푸셨다. 두 지역 왜 그리 다를까? 고향 분들이 가지고 있었던 예수님에 대한 선입관 때문일 게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학벌이 변변찮으시다는 걸 알고 있었고 능력을 지닐 만한 직업도 가문도 아니란 것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기쁨의 열매를 맺을 수 없었다. 스스로 잘 안다고 생각하는 것이 오히려 방해가 되었기에. 사실 우리도 주위의 아주 익숙한 것의 참된 가치를 깨닫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편견에 잡혀서. 이웃과 정 나누고, 친구와 우정 나누며 대화하는 건 우리의 소중한 체험들이다. 이 일들을 신앙의 눈으로 보면 바로 거기에 소중한 구원의 현실이 있음을 깨닫는다. 깨어 있는 신앙인은 비록 익숙하고 작은 것처럼 보이는 것에서도, 하느님 손길을 거기서 느끼리라. 따라서 세속의 눈에서 신앙의 삶으로 시선을 옮길 필요가 있다. 지난 걸 지나간 것으로 인정하지 않으면 지금과 다음은 바뀔 수 없을 게다. 바뀌지 않거나 버리지 않으면 힘든 인생 살게 될 수도. 자신은 물론 남도 힘들게 하리라. 물이 흐르지 않으면 썩기 마련, 변화를 거부하면 결국은 퇴보다. 변화의 힘든 과정을 거치면서 성숙한다. 아픔을 겪지 않는 변화는 영영 없다. 나자렛 고향 사람들이 생각을 바꾸었더라면, 주님 기적으로 풍요로움을 체험했으리라. 세속의 삶이 현재라면, 신앙은 지금과 다가올 미래이다. 오늘 나자렛에서 예수님 맞는 모습을 보면, 우리의 미성숙 모습도 엿보인다. 예수님과 함께 자라온 비교되는 자신들 초라한 민낯이 드러나는 것이 싫어서인지도 모른다. 신앙은 하느님 능력이 나를 움직일 수 있음을 믿는 삶일 게다. 지금의 내 모습이 편견과 아집으로 굳어진 고집불통의 삶은 아닌지 되돌아보면 참 좋겠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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