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예수님께서는 왜 고향에서 배척을 받으셔야만 하셨는가를 진지하게 묵상해 봅시다. | |||
---|---|---|---|---|
이전글 | 이전 글이 없습니다. | |||
다음글 | † 007. “내가 너와 함께 있으니 두려워하지 말아라.” [하느님 자비심, 파우스티나 성 ... |1| | |||
작성자강만연
![]() ![]() |
작성일2025-02-05 | 조회수138 | 추천수2 |
반대(1)
![]() |
제가 일반 지인인 신자분들에게 자주 언급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모든 말씀은 당연히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기 때문에 어느 하나 중요하지 않은 말씀이 없고 다 중요한 말씀이긴 하지만 그래도 좀 더 잘 와 닿고 공감이 잘 되는 말씀이 있다면 제가 가장 첫째로 꼽는 말씀이 나오는 복음 대목입니다.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그렇다면 그 이유가 과연 무엇일까를 한번 묵상해보며 우리 자신을 들여다봐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 한구석에 예수님께서 하신 이 말씀이 우리 자신에게도 해당이 되지 않는가 하는 것입니다. 정말 제대로 정직하게 가슴에 손을 올리고 성찰을 하게 된다면 뜨끔할 사람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오늘 수요일 복음만 놓고 봤을 때 예수님의 감정변화와 고향 사람들의 감정변화부터 먼저 살펴보겠습니다. 고향 사람들은 먼저 놀라운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유도 이유이지만 그 동기가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 회당에서 고향 사람들에게 준 가르침이었습니다. 여기에는 가장 주가 된 게 아마 성경의 내용일 것입니다. 또 성경의 내용을 가르치시려고 하시다 보니 그 당시 사람들의 지적 수준이 아주 질적으로 떨어지는 수준이기 때문에 누구나 알기 쉽게 그들이 사는 주변 환경과 같은 것을 가지고 비유를 통해서 설명을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단순한 지식도 지식이지만 그런 비유는 이 상황에서는 그들이 보기엔 그저 단순한 자연현상이거나 일상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 것처럼 단순하게 보이지만 그게 그 비유가 성경을 이해하는 데 아주 적절한 예시가 되었기 때문에 그들 눈엔 솔직히 평가를 하자면 대단한 것이라고 여겼던 것입니다. 그러한 사실을 그들 자신의 입으로 자인하고 있습니다. 바로 “저런 지혜는 어디서 받았을까?” 하는 대목입니다. 인정은 하긴 하지만 그들은 그걸 인정하고 싶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봤을 때 오늘날 시각으로 바라보고 이야기한다면 금수저 집안에서 태어나 명문 신학대를 나오고 해서 신학적인 내용과 성경을 말한다면 당연히 그 설명에 따르는 말의 권위를 인정해 주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봤을 때 뭐 제대로 학교도 나오지 않고 단순히 목수라는 기능공으로 성장을 했기 때문에 어디 집을 지을 때 기둥은 어떤 재료와 또 나무를 깎을 때 대패질은 벽면에 세우는 나무와 기둥을 지지하는 나무는 각각 달리 대패질을 해야 한다는 둥 그와 같은 전문적인 노하우 같은 것만을 사람들에게 이야기하셨다면 과연 그 사람들이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표현과 같은 감정적인 표현을 드러냈겠는가 하는 점입니다. 오히려 그들은 예수님의 목공 기술에 대해 찬사를 보냈을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상황과 전혀 다른 반응을 보여준 이유가 무엇인지는 어느 정도 아실 것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의 성장배경을 이미 봐왔고 또한 형제간의 관계까지도 알 정도이면 예수님에 대해 많은 부분을 알고 있는데 그들이 봤을 때는 그나마 그냥 보통의 일반적으로 누구나 알 수 있는 지식 정도의 수준이었다면 그래도 조금은 인정을 백번 양보해 할 수 있겠는데 그들이 봤을 땐 그런 환경에서 어떻게 그런 놀라운 지식이 나오며 다른 복음에서는 말씀에 권위까지 묻어난다고 하니 세상적인 표현으로 하자면 많이 알고 계신 지식 때문에 아니꼽다는 그런 기분이 들기 때문에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데 그렇다고 틀린 설명을 한다면 부정이라도 할 수 있을 텐데 그들이 반박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완벽하게 말씀을 하시니 그런 부정적인 마음이 도사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3절 끝에를 보면 마르코복음사가는 이런 사실을 그들의 내면심리를 잘 묘사했던 것입니다. 바로 예수님을 못마땅하게 여겼다는 사실을 기술한 것입니다. 이런 모습을 그와 같은 상황에서 말로 표현을 하셨는지 안 하셨는지는 복음의 내용만 가지고 판단했을 때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 당시 그들의 마음을 꿰뚫고 계시니 예언자는 고향에서는 존경을 받지 못한다고 하셨던 것이지 않을까 하는 추측을 해보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사실이 전적으로 같은 내용은 아니지만 현실에서도 여실히 드러난 적이 있었습니다. 고 노무현 대통령이 사법고시를 패스하고 잠시 판사로 재직하셨다가 얼마 안 하시고 변호사로 전향을 하셨던 것입니다. 문제는 대통령으로 선출되시기 전이나 후나 여전히 꼬리표처럼 따라다닌 게 바로 ‘학벌’이었습니다. 소위 말하면 ‘가방끈 콤플렉스’였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상고출신이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노 전 대통령께서 서울법대를 나왔다고 한다면 무시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예전에 평검사들과의 대화를 하는 프로에서 어떤 검사는 완전 노골적으로 이 문제를 간접적으로 언급을 해 망신을 주려는 의도까지 있다는 게 방송을 통해서도 알져진 사실입니다. 바로 그당시 검사와 같은 게 2000년 전 오늘 복음에 나오는 바로 고향 사람들과 같은 사람입니다. 근데 그 검사는 사법고시 패스해 법조인이 되고 또 노무현 대통령보다는 더 좋은 학벌로 사법고시를 패스했는지는 모르지만 물론 그 조건은 낫다고 해도 그들이 그들 스스로를 보지 못한 면이 있습니다. 저 같았으면 그와 같은 발언을 한다는 게 더 창피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패스할 때 뽑는 인원하고 노 대통령이 사법고시 패스할 때 뽑은 수에서도 이미 상대적으로도 노 대통령의 실력이 월등함을 알 수 있고 또한 이 사실 외에도 그들은 이미 법대를 나와 법을 전공한 사람의 입장에서 시험에 응시를 한 것이고 노 대통령께서는 순수히 그것도 독학으로 공부를 해서 그와 같은 결과를 이루어냈다고 한다면 그냥 단순히 합격했다는 그 사실 하나로 동등한 레벨로 인정한다는 것은 바보 같은 생각입니다. 오히려 이미 출발조건에서부터 균등한 기회의 조건으로 경쟁한 것이 아니였기 때문에 더더욱 노 대통령님을 자기들보다도 더 대단하다고 생각해야 하는 게 보통 정상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이라면 가져야 할 생각일 겁니다. 사실 그렇기 때문에 남을 상대적으로 남의 다른 조건을 빌미로 해서 남의 우월한 점을 깎아내려 상대적으로 낮게 된 자신의 위치를 높이려고 했기 때문에 그런 평가를 했던 것입니다. 솔직히 표현하면 인간적으로 비루하고 졸렬한 모습일 뿐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단순히 그때 예수님께서 사람들로부터 이와 같은 대접을 받으셨다는 그런 사실을 아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닐 것입니다. 마치 역사를 배울 때 단순히 그 역사적인 사실이 일어났다는 그 사실을 아는 게 중요한 게 아니고 그 사실이 역사적으로 가지는 의미가 중요한 것입니다. 오늘 복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오늘 복음을 통해서 예수님의 그런 것을 통해서 바로 우리의 신앙에 접목을 시켜 묵상하고 거기서 중요한 교훈을 배우고 또 우리 내면을 성찰해야 할 것입니다. 바로 그건 우리도 그 당시 예수님을 향해 예수님의 모습을 실제 눈에 보이는 능력을 있는 그대로 바라봐야 하는데 상대적으로 그들 내면에 있는 보이지 않은 열등감이나 또한 예수님과 비교했을 때 가지게 되는 상대적인 박탈감 때문에 예수님을 배척했듯이 우리도 한 신앙 공동체에서 그와 같은 모습이 우리 내면에는 어떤 모습으로 자리잡고 있는지 묵상을 하며 그와 같은 모습이 조금이라도 있다고 한다면 냉정하게 성찰해 그런 마음이 우리 마음속에 자리잡지 못하게끔 자신의 신앙뿐만 아니라 자칫 잘못하면 신앙 공동체에도 해악을 끼칠 수 있는 독버섯과 같은 걸 과감히 없애려고 노력해야 될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