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연중 제4주간 수요일, 성녀 아가타 동정 순교자 기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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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박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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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25-02-05 | 조회수117 | 추천수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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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4주간 수요일, 성녀 아가타 동정 순교자 기념] 마르 6,1-6 “예수님께서는 그곳에서 몇몇 병자에게 손을 얹어서 병을 고쳐 주시는 것밖에는 아무런 기적도 일으키실 수 없었다.“
“손뼉도 마주쳐야 소리가 난다”고 했습니다. 한 쪽 손을 아무리 세게 휘둘려봐야 반대쪽 손이 그에 응해서 마주쳐주지 않으면 박수 소리는 나지 않지요. 주님께서 우리 삶에 일으키시는 기적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분께서 기적을 일으키시는 이유가 단순히 당신의 권능과 위대함을 드러내기 위함이라면 우리가 어떤 반응을 보이든 상관 없겠지만, 그분의 기적은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드러내는 표징이기에 우리의 응답이 필수적인 요소인 겁니다. 사랑은 일방통행이 아니라 쌍방의 대화이기 때문입니다. 상대방을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을 여러가지 방식들을 통해 주고 또 받으며 성숙되고 완성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 속 나자렛 마을 사람들에게서는 그럴 의지가 보이지 않습니다. 사람들에게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고 여러가지 기적과 표징들로 구원으로 이끄는 ‘공생활’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시고 나서, 설레임 반 기쁨 반으로 고향마을을 방문하신 예수님이었습니다. 당신 생애의 대부분을 함께 보내며 기쁨과 슬픔을 함께 했던 그들이 복음을 받아들이고 회개하여 구원받는다면 그보다 더 큰 기쁨은 없을거라 생각하셨겠지요. 그런데 그들은 예수님께서 내미신 손에 자기들 손을 마주대지 않았습니다. 자기들이 그분에 대해 알고 있는 단편적인 정보들만을 가지고 그분에 대해 다 안다고 착각하고는, 그분을 ‘주님’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이기를 거부한 겁니다. 게다가 같은 동네에 살던 ‘별 볼 일 없던’ 젊은이가 놀라운 지혜와 능력을 갖게 된 것을 질투하기에 이르지요. 믿음의 눈으로 주님을 바라보았다면 구원받을 기회를 얻었을텐데, 시기 질투의 눈으로 그분을 바라보아 오히려 죄 지을 이유를 만들어버린 안타까운 모습입니다.
고정관념과 선입견에 사로잡히면 상대방이 지닌 진면목을 알아보기 어려운 법입니다. 그건 주님을 바라볼 때에도 마찬가지지요. 내가 주님과 그분 뜻을 안다고 여기는 교만이 그분에 대한 오해를 만들고, ‘주님이라면 이래야한다’고 그분께 강요하는 아집과 독선이 내 마음 속에 왜곡된 ‘하느님 상’, 즉 ‘우상’을 만들게 됩니다. 그런 마음가짐으로 하는 건 신앙생활이 아니라 ‘우상숭배’가 되어버리지요. 내가 만든 우상의 하느님을 믿느라 정작 참 하느님을 외면하는 일이 벌어지는 겁니다. 그러니 우상에서 벗어나 주님의 참된 모습을 바라봐야 합니다. 믿음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벗어나 하느님께로 나아감으로써 그분 안에서 참된 자유를 누리는 것이지, 하느님을 나의 비좁은 생각 안으로 억지로 밀어넣는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살면서 마주하게 되는 주님의 모습과 뜻이 내가 알던 모습과, 기대하던 바와 다르더라도 기꺼이 내 안에 받아들이고 따라야 합니다. 의사의 능력에 환자의 신뢰가 더해져야 치료가 이루어지는 것처럼, 주님의 능력에 나의 믿음과 순명이 더해져야 내 삶에 놀라운 기적들이 일어나는 법입니다.
* 함 승수 신부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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