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 오직 믿음으로 예수님께 기대는 삶을 / 연중 제4주간 금요일(마르 6,14-29)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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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박윤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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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25-02-06 | 조회수88 | 추천수2 |
반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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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오직 믿음으로 예수님께 기대는 삶을 / 연중 제4주간 금요일(마르 6,14-29) 복음에 탄생과 죽음을 상세히 기록된 이는 예수님과 세례자 요한일 게다. 특히 ‘세례자 요한의 죽음’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에 버금가는 처절함과 억울함이 녹아 있다. 헤로데는 최고의 권력을 지닌 임금이었지만, 한평생 주위의 시선을 의식하며 두려움에 떨면서 살았던 이라 여겨진다. 그는 정치적인 입지를 위한 정략결혼으로 동생 필리포스의 아내 헤로디아를 가로챘다. 요한이 “동생의 아내를 차지하는 건 옳지 않습니다.” 라고 여러 차례 간언할 때 두려워하였지만, 함부로 하질 못했다. 자신의 생일잔치 때도 마찬가지다. 헤로디아의 딸이 춤을 추어 그를 즐겁게 하자 그 소녀에게 무엇이든 원하는 것 주겠다고 호언장담했다. 결국은 그 애가 요한의 머리를 요구하자, 그는 시선이 두려웠지만 끝내 이에 응했다. 그리고 여러 곳에서 예수님 이름이 널리 알려지자, 드디어 “내가 목을 벤 그 요한이 되살아났구나.” 라며 몹시 두려워한 이다. 그렇다.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인간의 시선을 두려워한 것 같다. 한마디면 모든 결정을 할 절대 권력자지만, 늘 불안하고 초조하기만. 반면 요한은 주위의 시선이 아닌 하느님만 두려워했다. 그러기에 감히 그 여우같은 그 헤로데에게 직언과 죽음을 기꺼이 받아들인다. 우리는 어떨까? 정녕 하느님을 두려워할까, 아니면 주위 시선 더 두려워서 속 좁은 이 마냥 살지 않은지? 이 세례자 요한의 죽음에서 영국의 대법관이며 수상인 토마스 모어 성인이 생각난다. 당시 국왕인 헨리 8세는 앤 불린과 재혼할 생각으로 캐서린 왕비와 이혼하는 데 성인에게 동의를 구했지만, 그는 이혼을 끝내 반대했다. 이게 빌미가 되어 그는 단두대의 찬이슬로 처참하게 참수되었다. 성인은 세례자 요한처럼 양심과 정의를 지키는 대가로 그 지존한 생명을 내놓았다. 이렇게 권력 앞에서도 양심을 저버리지 않았다. 교회는 그를 기억하고 그 삶 본받고자 시성했다. 예수님 재판과 십자가형을 선고한 빌라도도 마찬가지다. 그는 예수님께서 죄가 없으심을 누구보다도 잘 알았지만, 군중을 만족시키려고 결국 죄수였던 바라빠를 놓아주고 무고하신 예수님을 채찍질하고 십자가형에 처하라고 내어주었다. 이처럼 요한의 죽음은 이미 충분히 예견된 것으로 메시아의 앞날을 미리 보여 준 것이다. 그는 예수님께서 가실 그 길, 준비하러 왔기에. 오늘 우리는 허황된 권력과 무절제한 욕망 지키기에만 급급한 헤로데와는 정반대로, 오로지 하느님 섭리 안에만 자신을 맡긴 요한의 삶을 본다. 살면서 인생의 억울함을 받아들이면, 요한의 삶을 닮는 것이다. 어쩜 그것도 역시 주님 섭리이리라. 이렇게 악연도 이끄심이 있을 수도. 그러기에 인연에 담긴 신비를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자. 체면이나 자존심, 인기에 휘둘려다 보면 영혼이 없는 이처럼 될 게다. 자신의 이런 모습은 사회에 빛과 소금이 되는 정의와 평화의 역할을 잃어갈 게다. 우리는 저 철없는 헤로데를 통해 우리네 진면목을 의당 성찰하게 되리라.
그리하여 지금의 우리 모습은 예수님을 위해 요한의 길을 걷는지를? 오늘 우리는 한 권력자에 의해 억울하게 생을 마감한 먼저 온 이의 운명을 본다. 그는 예수님께서 오실 길을 준비하려고 광야에서 회개 바란 것만 그치지 않고, 그분께서 권력의 희생양이 되는 걸 미리 보여 주는 운명을 따랐다. 하느님 섭리는 인간의 의지를 뛰어넘는다. 때로는 우리가 원하는 방식이 아니더라도, 하느님을 신뢰하는 이들은 자신의 운명을 그분께 의지하며 산다는 걸 잊지를 말자.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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