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연중 제4주간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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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조재형 쪽지 캡슐 작성일2025-02-07 조회수322 추천수6 반대(0)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는 말이 있습니다. 원효대사가 당나라로 유학하러 가기 위해 길을 떠나던 중, 밤이 되어, 한 동굴에서 잠을 자게 됩니다. 한밤중에 갈증을 느낀 원효대사는 옆에 있던 물을 발견하고 그것을 마십니다. 물은 상쾌하고 갈증을 해소해 주었기에 큰 만족감을 느낍니다. 그러나 아침이 되어 주변을 보니, 자신이 물을 마신 것은 실제로 해골 속에 고여 있던 물이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 사실을 깨달은 순간, 그는 극도의 혐오감과 구토를 느낍니다. 원효대사는 이 경험을 통해 깨달음을 얻습니다. 자신이 밤에는 해골이라는 사실을 몰랐기 때문에 물이 상쾌하고 만족스럽게 느껴졌지만, 낮에 해골임을 알자 혐오스럽게 느껴졌다는 점에서, 현상의 아름다움과 추함, 좋음과 나쁨은 외부 대상 자체가 아니라 자신의 마음에서 비롯된 것임을 이해하게 됩니다. , "모든 것은 오직 마음이 만들어낸다"라는 일체유심조의 깊은 진리를 체험적으로 깨닫게 된 것입니다.

 

데카르트는 유명한 명제를 우리에게 남겼습니다.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Cogito ergo sum)"라는 말을 통해 생각하는 마음(정신)을 존재의 근거로 삼았습니다. 그는 감각이나 외부 세계가 의심스러울지라도, 생각하는 주체로서의 ''는 의심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데카르트는 세계를 이해하려면 생각하는 주체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불교는 모든 세계가 마음의 투영이라고 보았습니다. 이 둘 다 마음(정신)을 경험과 존재의 본질로 삼습니다. 데카르트가 "나는 생각한다"라는 사유를 통해 세계를 인식하고 존재를 확인했다면, 불교는 "일체유심조"를 통해 세계 자체가 마음의 작용임을 드러냅니다. 데카르트는 자아의 확실성을 통해 존재를 증명하고자 했고, 불교는 자아를 초월하여 마음의 본질을 탐구하고자 했습니다.

 

일이 많았던 날이 있었습니다. 성당 컴퓨터를 새로 설치하는데 문을 열어 주면 좋겠다는 문자를 받았습니다. 제가 워낙 일찍 일어나니 그런 부탁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성당에 관리인이 없고, 이른 시간이라서 기꺼이 문을 열어 주었습니다. 이른 아침부터 봉사하려는 마음이 고마웠습니다. 사제관 난방에 필요한 필터를 갈아야 한다는 말을 듣고 기다렸습니다. 필터는 6개월에 한 번은 갈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고맙게도 형제님이 필터를 갈아주었습니다. 93세 어르신을 위한 병자성사가 있었습니다. 건강하셨던 어르신인데 이제는 거동이 불편해서 요양병원으로 옮겼다고 합니다. 부주임 신부님이 성지순례 가서 토요일 미사를 봉헌했습니다. 청년들과 만날 기회가 적었는데 토요일에 있는 청년 미사를 봉헌하니 청년들을 만나서 좋았습니다. 미사를 마치고 나니, 구역모임이 있었습니다. 지난 송년, 구역 장기 자랑에서 1등 한 구역이 뒤풀이한다고 모였습니다. 덕분에 저녁을 맛있게 먹었습니다. 정말 마음먹기에 달렸습니다. 일이 많다고 짜증 내면, 아침부터 문 열어 달라는 부탁에 짜증을 내면 하루가 길고 힘들었을 겁니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이면 모든 것이 하느님의 사랑이요, 하느님의 뜻으로 여겨집니다.

 

매일 강론을 준비하는 것도 하느님의 뜻을 전하는 거라 생각하니 감사할 일입니다. 성당의 문을 여는 것도 제게 열쇠가 있기 때문이니 감사할 일입니다. 짚신 장수와 우산 장수의 어머니는 비가 오면 짚신 장수 아들을 걱정했습니다. 짚신이 팔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날이 맑으면 우산장수 아들을 걱정했습니다. 우산이 팔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생각을 바꾸면 비가와도 좋습니다. 우산장수 아들이 우산을 팔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날이 맑아도 좋습니다. 짚신장수 아들이 짚신을 팔 수 있기 때문입니다. 생각을 바꾸면 세상이 바뀌는 겁니다. 동양의 현인 장자는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들보나 기둥 재목은 성벽을 무너뜨리는 데는 유용하지만 구멍을 막는 데에는 소용없다. 그것은 쓰임이 다르기 때문이다. 천리마는 하루를 달릴 수 있지만 쥐를 잡는 데에는 고양이만 못하다. 그것은 재주가 다르기 때문이다. 올빼미는 밤에는 벼룩을 잡고 터럭 끝도 볼 수 있지만 낮에 나와서는 눈을 뜨고도 큰 산조차 보지 못한다. 그것은 본성이 다르기 때문이다.” 제게는 큰 울림을 주었던 말입니다. 세상 모든 것은 다 쓰임이 있습니다. 세상 모든 것은 다 재주가 있습니다. 세상 모든 것은 다 본성이 있습니다. 그 쓰임과, 재주, 본성이 다를 뿐입니다. 남과 비교해서 교만할 필요도 없습니다. 남과 비교해서 아쉬워할 필요도 없습니다.

 

많은 분이 세례를 받았지만, 신앙인이 있어야 할 자리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주님 안에서 참된 평화와 참된 행복을 만나면 좋겠습니다. 귀소본능의 아름다운 모습을 우리는 루가복음 15장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의 집을 떠났던 둘째 아들은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옵니다. 우리는 그것을 회개라고 부릅니다. 아버지는 초라한 모습으로 돌아온 아들을 따뜻하게 맞이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배에서 내리시어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렸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기 시작하셨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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