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연중 제5주일 다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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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박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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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25-02-09 | 조회수91 | 추천수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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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5주일 다해] 루카 5,1-11 "그들은 배를 저어다 뭍에 대어 놓은 다음,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우리가 살면서 누리는 행복은 크게 존재의 행복과 소유의 행복으로 나뉩니다. 존재의 행복이란 제가 우리 엄마 아들이라 느끼는 행복이고, 소유의 행복이란 어머니가 저를 위해 밥을 차려주시고 필요한 것들을 채워주실 때 느끼는 행복이지요. 그리고 이 두 행복은 모두 우리가 이 세상에서 생명을 유지하는 일, 즉 ‘생존’과 연관됩니다. 이 생존이 위협받으면 우리는 마음 속으로 불안을 느끼고, 그 불안을 어떻게든 해결하려고 들지요. 자기 소유를 늘려 불안감을 줄이는 것도 한 방법입니다. 또 다른 방법은 나의 생존을 책임져 줄 수 있는 누군가와 깊은 일치를 통해 강한 유대감을 느낌으로써 불안감을 해소하는 것입니다. 전자는 불안을 극복하기 위한 근본적인 대책이 될 수 없습니다. 아무리 많은 재산을 소유하고 있더라도 내 존재의 기반을 단단한 반석 위에 세워두지 않으면 불안 자체를 해소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당연히 참된 행복을 누릴 수도 없지요. 참된 행복은 내가 누구보다 믿고 의지하며 사랑하는 누군가가 나를 사랑하고 있다는 확신에서 옵니다. 그리고 그 확신은 내가 그의 뜻에 맞는 일을 충실히 실천할수록, 적어도 그 부분에서만큼은 나 스스로가 누구 앞에서도 당당하고 떳떳해지는 만큼 강해지는데, 문제는 그러기 위해서 내가 소유의 행복을 포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주님을 만나고 기적을 체험함으로써 불안을 극복하고 기꺼이 소유를 포기한, 그렇게 주님을 따름으로써 참된 행복을 누리게 된 제자들의 이야기입니다.
시몬 베드로와 다른 두 어부가 예수님을 만나 처음으로 들은 말씀은 이것이었습니다.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 갈릴래아 호수는 가로가 11킬로미터, 세로가 21킬로미터에 달할 정도로 큰 호수입니다. 수심 또한 깊어서 호수 중앙은 40미터가 넘지요. 게다가 저녁 때가 되면 호수 중앙에는 북쪽에서 불어오는 바람과 서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뒤엉켜 거센 풍랑이 일어나는데, 한번 그 풍랑에 휩쓸리면 아무리 숙련된 어부라도 목숨을 부지할 수 있을거라 장담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어부들은 물고기가 많이 잡히는 저녁시간에 조업할 때면 되도록 호수 깊은 곳까지는 들어가지 않으려고 했지요. 그런데 예수라는 분이 갑자기 나타나서는 깊은 데까지 저어나가서 고기를 잡으라고 하는 겁니다. 우리가 삶의 참된 기쁨과 행복을 충만하게 누리기 위해서는 외적인 환경이나 물질적인 조건에 집착할 게 아니라, 내면 깊은 곳으로 침잠해 들어가 그 안에 계신 하느님을 만나야 한다는 뜻입니다. 또한 하느님은 쉽고 편한 방법으로는 만날 수 없으며, 자신을 깊이 성찰하는 수고와 변화되려는 노력 그리고 그 힘든 과정을 끝까지 지속하는 인내가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즉 우리가 기도라는 배를 타고 마음 깊은 곳으로 저어나가 하느님을 만나면, 그분께서 우리 삶이라는 그물에 충만한 기쁨의 물고기들을 가득 담아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진리를 머리로 이해한다고 해도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삶에서 실천하기는 어려운 법입니다. 모든 것을 자신의 경험과 지식을 통해 판단하려고 드는 우리의 완고한 마음 때문입니다. 자기 판단만이 옳고 다른 이는 틀렸다고 여기는 독선과 교만 때문입니다. 만약 다른 어부였다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발끈했을 겁니다. 내가 갈릴래아 호수에서 그물질한 세월이 몇 십년인데, 당신이 뭘 안다고 나서서 이래라 저래라 하느냐고 말이지요. 그러나 베드로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밤새도록 애썼지만 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했던 쓰라린 실패의 기억은 과거에 묻어두고, 지금 여기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자기 고집과 경험에 사로잡혀 계속해서 실패의 쓴맛만 곱씹는 것보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따름으로써 자신에게 열릴지 모를 일말의 가능성에 희망을 걸기로 한 것이지요. 그렇게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따르는 그 자리에서 베드로는 놀라운 기적을 체험하게 되었고, 그의 마음 속에 커다란 변화가 일어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기 전에는 그분을 ‘스승님’으로 생각했지만, 그분의 말씀을 따르고 나서 비로소 그분이 ‘주님’이심을 알아보게 된 겁니다. 그것이 우리가 참된 행복을 누릴 수 있는 두번째 비결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의 주님이심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그분 뜻에 순명하면, 그분께서 나의 삶에 놀랍고도 긍정적인 변화를 일으켜 주시는 것이지요.
하지만 베드로는 자기 삶에 일어난 갑작스러운 변화에 당황하여 두려움을 느끼게 됩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도 비슷한 경험을 하지요. 그는 영적인 환시를 통해 높은 어좌에 앉아계신 주님을 보고는 커다란 두려움에 사로잡혀 이렇게 고백합니다. “큰일 났구나. 나는 이제 망했다. 나는 입술이 더러운 사람이다. 입술이 더러운 백성 가운데 살면서 임금이신 만군의 주님을 내 눈으로 뵙다니!” 부족하고 약한 인간인 자신은 말과 행동으로 죄를 지어 더러워진 존재임을 고백하는 동시에, 그렇게 준비되지 않은 부정한 상태로 감히 전능하신 하느님을 뵈었으니 그분께서 자신에게 벌을 내려 죽게 될 거라고 생각하여 두려워했던 겁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에게 벌을 내리시는 대신 그에게 ‘사랍’, 즉 가장 높은 계급의 천사를 보내시어 활활 타오르는 정화의 불꽃으로 그의 죄를 씻어주십니다. 이에 큰 용기를 얻은 이사야는 당신의 일을 맡길 일꾼을 뽑으시는 하느님 앞에서 자기에게 그 소명을 맡겨달라고 자원합니다. 하느님의 은총 덕분에 겁 많은 죄인에서 용기있는 예언자로 변화되었음을 행동으로 드러낸 것이지요.
다시 오늘 복음으로 돌아와서,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놀라운 기적을 보고 그분께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 하느님의 거룩한 현존 앞에 서게 되면 이렇게 인간은 자신이 그분을 뵙기에, 그분께서 베푸시는 은총을 누리기에 한없이 부족한 존재임을 깨닫고 두려워하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럼에도불구하고 베드로를, 그리고 우리를 특별한 소명에로 부르십니다. 그리고 우리 각자가 그 소명에 합당한 존재로 변화되도록 이끄시지요. 하느님께서 이사야를 겁쟁이에서 대 예언자로 변화시키신 것처럼, 예수님은 베드로를 고기 잡던 어부에서 사람들을 구원으로 이끄는 선구자, 인도자로 변화시키신 겁니다. 참된 행복은 그 변화에서부터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시작된 참된 행복은 두 단계를 거쳐 다져지고 완성됩니다. 첫째는 ‘모든 것을 버리는’ 것입니다. 여기서 ‘모든 것’이란 재물과 인간관계를 포함하여 세속적인 모든 것을 가리킵니다. 그것들에 집착하고 의지하기 시작하면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지고, 그분과의 관계가 끊어지면 모든 걸 잃게되니 그렇게 되지 않도록 세속적인 것들을 과감하게 내려놓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믿고 따르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주님을 등에 업고 내 뜻을 이루는 ‘호가호위’가 아닙니다. 주님 뒤에 서서 그분만 바라보며 철저히 그분 뜻과 가르침을 실천하는 ‘추종’의 삶이지요. 그 과정에서 당장은 손해를 보고 희생하는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가 되질하는 그 되로 우리에게 갚아주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나눔과 사랑을 실천하여 완전히 비워낸 그 그물에 주님은 은총과 축복을 넘치도록 가득 담아주실 겁니다.
* 함 승수 신부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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