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송영진 신부님_<‘위선’은 곧 ‘어리석음’입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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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최원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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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25-02-11 | 조회수105 | 추천수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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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 몇 사람이 예수님께 몰려왔다가, 그분의 제자 몇 사람이 더러운 손으로, 곧 씻지 않은 손으로 음식을 먹는 것을 보았다(마르 7,1-2).” “그래서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예수님께 물었다. ‘어째서 선생님의 제자들은 조상들의 전통을 따르지 않고, 더러운 손으로 음식을 먹습니까?’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이사야가 너희 위선자들을 두고 옳게 예언하였다.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다. 그들은 사람의 규정을 교리로 가르치며 나를 헛되이 섬긴다.‵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는 것이다.’ 또 이어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너희의 전통을 고수하려고 하느님의 계명을 잘도 저버린다. 모세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여라.‵ 그리고 ′아버지나 어머니를 욕하는 자는 사형을 받아야 한다.‵고 말하였다. 그런데 너희는 누가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제가 드릴 공양은 코르반, 곧 하느님께 바치는 예물입니다.‵ 하고 말하면 된다고 한다. 그러면서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더 이상 아무것도 해 드리지 못하게 한다. 너희는 이렇게 너희가 전하는 전통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폐기하는 것이다. 너희는 이런 짓들을 많이 한다.’(마르 7,5-13)”
1) 여기서 ‘조상들’은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들이 아니라, 구약시대 때의 유명한 율법학자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또 여기서 ‘전통’이라는 말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그 ‘전통’이 아니라, 구약시대 율법학자들이 만들어 놓은, ‘할라카’ 라고 부르는 규정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구약시대 때부터 내려오는 ‘할라카’는 “나는 주 너희 하느님이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자신을 거룩하게 하여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레위 11,44).” 라는 하느님의 계명을 잘 실천하기 위해서 구체적으로 그 실천 방법을 정해 놓은 ‘행동 지침’이었습니다. 따라서 ‘할라카’를 만든 본래 의도는 좋은 것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유대인들은 그 규정의 본래 의도는 잊어버리고, 그 규정을 지키는 일에만 집착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기준으로는 그것은 겉으로만 거룩한 척 하고 속은 거룩하지 않은 ‘위선’이었습니다. <당시에 ‘할라카’는 바리사이들만 철저하게 지켰고, 바리사이들과 대립 관계에 있던 사두가이들은 지키지 않았습니다. 또 일반 서민들도 그런 규정은 무시하면서 살았고, 예수님도 예수님의 제자들도 지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바리사이들은 ‘할라카’를 지키지 않는 사람들을 ‘불경한 자들’, 또는 ‘부정한 자들’로 취급했습니다.> 5절의 “어째서 선생님의 제자들은 조상들의 전통을 따르지 않고, 더러운 손으로 음식을 먹습니까?” 라는 말은, “어째서 당신들은 ‘할라카’에 규정되어 있는 정결예식을 행하지 않고 부정한 행동을 하는가?” 라고 시비를 거는 말입니다. 이 말은, “당신들은 부정한 죄인들이다.” 라고 비난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2) 바리사이들의 정결예식은 우리나라의 ‘목욕재계’와 비슷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목욕재계’는 원래 ‘마음을 씻는’ 일입니다. 그런데 마음을 씻는 일은 눈에 보이지 않는 일이기 때문에, 몸을 씻는 ‘눈에 보이는 행위’를 통해서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의 깨끗함’을 이루려고 하는 일입니다. 바리사이들의 정결예식도 원래는 ‘거룩함’에 도달하기 위한 일이었는데, 그들은 ‘몸의 깨끗함’을 ‘거룩함’으로 착각했고, 결국 몸이 깨끗하면 거룩한 것이라고 우기는 위선자들이 되어버렸습니다. 그것은 “거룩한 사람이 되어라.” 라는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만(규정만) 지키는 ‘어리석은 위선’이었습니다(8절).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어리석음과 위선을 꾸짖으셨습니다.
3) 11절에 언급되어 있는 ‘코르반’ 관습도 원래는 하느님을 좀 더 잘 섬기기 위한 일이었습니다(민수 30,3). <하느님께 봉헌한 물품을 함부로 세속적인 일에 사용하는 것을 예방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면서 원래 목적은 잊어버리고 부모 공양을 회피하기 위한 방법으로 악용되었습니다. 그것은, “십계명 제1계명, ‘한 분이신 하느님을 흠숭하여라.’를 잘 지키기 위해서” 라는 명목으로 십계명 제4계명, ‘부모에게 효도하여라.’를 안 지킨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것도 역시 인간들이 만든 규정만 중시하고 하느님의 계명은 무시하는 짓이라고 꾸짖으십니다(13절). 그런데 만일에 실제로 계명들이 서로 충돌하는 것 같은 상황을 만나면 어떻게 될까? 예를 들어, 주일을 지키면 효도를 못하게 되고, 효도를 하면 주일을 지킬 수 없는 상황이라면? 병석에 누워 있는 부모를 간병하다가 주일을 못 지키는 일이 생기거나, 반대로 주일을 지키려고 성당에 가면 병석에 누워 있는 부모를 방치하게 되는 일이 생긴다면? 실제로 그런 문제로 고민하는 이가 있을 수도 있는데, 우리 교회는 ‘부득이한 사정’으로 주일을 지킬 수 없는 경우에 대한 해결책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사실, 두 계명이 서로 충돌하는 일은 생기지 않습니다. 모든 계명은 ‘사랑’이라는 가장 큰 계명 하나로 통합됩니다. <기도하면서 부모를 간병한다면, 주일을 지킨 것입니다. 하느님에 대한 사랑과 부모에 대한 사랑은 하나입니다.> 만일에 어떤 계명 때문에 다른 계명을 못 지킨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자기가 하고 싶은 일만 하려고, 또는 하기 싫은 일은 안 하려고 핑계를 대는 사람입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 [출처] 연중 제5주간 화요일 강론|작성자 송영진 모세 신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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