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하느님의 법과 사람의 법이 서로 이해 충돌이 될 때 기준이 되는 것이 있다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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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강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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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25-02-11 | 조회수129 | 추천수2 |
반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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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을 조금 다른 시각에서 묵상해봤습니다. 저는 과거에 여러 신부님과 또 지금은 우리나라에서는 아빠스님이 두 분 계시는데 두 분 중에 한 분, 야고보 아빠스님께도 여쭤본 적이 있는 질문입니다. 바로 어떻게 하면 신앙생활을 잘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이었습니다. 제 폰에는 고성수도원원장 신부님으로 저장이 돼 있습니다. 아마 2012년 아니면 2013년쯤에 저장했을 것 같습니다. 신부님과 아빠스님으로부터 듣게 된 공통된 답은 없다는 것입니다. 정답 같은 것은 없지만 정도는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게 바로 우리가 흔히 말하는 기본입니다. 기본에 충실하는 것입니다.
저는 언어를 가르쳤던 사람으로서 특히 외국어를 지도한 사람으로서 이 말씀에 누구보다도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저는 학원을 경영했을 때 아이를 상담하며 학부님께 꼭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약 처음 일주일 정도는 초등학생이 오나 중등이 오나 고2가 오나 이 시간은 누구나 다 제 수업을 들으려면 꼭 이수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때 어떤 학생은 왜 이런 걸 지도하는지 모르겠다면서 학원을 다니지 않고 다른 학원을 다니겠다고 그만둔 학생도 있었습니다.
이 과정을 이수한 학생도 처음엔 따분하고 좀 지루하긴 했지만 어떻게 저한테서 오랜 시간 동안 지도를 받게 된 학생은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후에는 제가 말하지 않아도 그 애들이 먼저 다 알고 있습니다. 어떤 경우는 형제가 오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 형제는 터울이 좀 납니다. 그래서 누구나 이 과정을 듣게 되는 건 그들이 집에서 어떤 경우는 서로 말을 하거나 또 애들 학습에 관심이 많은 어머니는 그런 상황을 파악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렇게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형이 봐서는 어떻게 동생이 배우는 것을 나는 동생보다 더 잘하는데 똑같은 것을 배우는가 하는 의문이 든다고 하는 것은 당연했지만 나중에서는 왜 제가 그런 지도방법을 고수하는지 알게 됩니다. 이건 무엇이냐 하면 영어라는 언어를 이해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개념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개념에서 계속 뿌리가 확장이 돼서 새로운 개념과 복합적으로 어우러져 또 다른 개념이 형성되기 때문입니다. 사실은 이 개념을 모르면 뿌리는 같은데 실상은 다른 개념으로 이해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영문을 이해하는 눈이 벌써 달라짐을 본인 스스로가 느끼게 됩니다. 그럼 그렇다고 제가 가르치는 일주일의 시간이 뭐 아주 특별한 것이냐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보통의 교재에도 나오는 내용입니다. 초등 고학년, 아니면 중등 초급과정에도 언급된 내용입니다.
근데 보통 보면 그 과정을 대부분 등한시합니다. 그게 교재에 있어도 그냥 넘어갑니다. 이런 강사는 마치 100미터 정도의 산을 등산하고서 마치 해발 1000미터 정상의 산도 그냥 지금처럼 해서 900미터만 더 올라가면 그 산도 오를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겁니다. 물론 이 말도 틀린 말이라고 단정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또 완전히 맞다고 할 수 없습니다. 생각이야 그럴 듯합니다. 근데 막상 해보면 결과는 자신이 생각했던 것과 판이하게 다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기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만약 사람이 기계라면 가능할 겁니다. 기계는 다른 변수가 작용할 여지가 없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람은 고도가 높아질수록 가령 거리는 수직이지만 이해를 돕기 위해 평지라고 해서 생각해보면 동일한 속도로 어느 시간 후에 그 시간만큼 이동했을까요? 가면서 에너지가 떨어지기도 하기 때문에 수학공식처럼 완전히 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마치 신앙도 이와 같은 원리가 적용되는 것 같습니다. 등산에 비유하겠습니다. 정상에 오르는 것이 목적입니다. 또 그게 완성이라고 한번 가정을 해보겠습니다. 지리산 천왕봉을 오르는 것도 중산리를 통해서 오를 수도 있고 전라도 지역이면 뱀사골로 해서도 오를 수 있고 장터목으로 해서 오를 수도 있고 다양하게 오를 수 있습니다. 지리산은 사람에 비유하면 여자와 같은 산입니다.
설악산은 남자와 같은 산이라고 일반적으로 산악인들은 그렇게 비유합니다. 아무리 지리산도 어려운 산 같아도 해발 고도가 낮은 산에서 기본적인 산악기초에 충실해서 산행을 한 사람이라면 얼마든지 속도가 느릴 수는 있지만 충분히 천왕봉에 오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설악산 같은 산은 지리산을 등반하는 방식과는 미묘한 차이가 있습니다. 그 미묘한 차이를 잘 알아야 설악산도 악산이라고는 하지만 충분히 해낼 수 있는 산입니다. 이런 내용을 왜 장구한 설명을 드리는지 조금은 의아해하실 수 있을 겁니다. 지금까지의 설명이 사실 각각의 사실에 대입해보면 신앙에서도 거의 통하는 말이 됩니다. 이와 같은 사실을 통해서 이제 오늘 복음 안으로 들어가보셨으면 합니다. 오늘 복음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하느님의 법과 사람의 법, 두 법이 있습니다. 서열이라고 하긴 좀 그렇지만 굳이 표현하자면 두 법은 엄연히 성격상 완전 다르고 또 서열을 말하자면 당연히 하느님의 법이 사람의 법보다 더 상위법이 될 것입니다. 근본적인 개념을 놓고 보면 상위법은 하위법과 형식면에서는 다른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는 하위법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근본정신을 따져보면 그렇습니다. 이런 전제라면 하위법을 어기면서 상위법을 만약 준수했다면 과연 상위법을 제대로 준수했다고 할 수 있을까 하는 문제에 봉착할 수 있습니다. 설령 표면적으로는 지켰다고 볼 수 있는 것처럼 보일지는 모르지만 실제로는 모순입니다. 마치 이건 사람이 태어나 서는 법도 모르면서 날 수 있다고 말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하느님의 법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의 법을 완전히 무시하고 무조건 하느님의 법 규정에 초점을 맞추고 그와 같은 것에만 집중하고 사람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기본조건을 무시하게 된다면 그와 같은 행동을 과연 하느님께서 보신다면 잘했다고 칭찬하실 것 같은지를 한번 묵상해보면 바로 자명한 답이 나올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한번 오늘 복음을 가지고 실제 우리 신앙 안에서 일어나는 현실의 한 단면을 살펴보는 것으로 해서 묵상을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구체적인 설명은 이 자리에서는 피하겠습니다.
실제 보면 하느님의 법이 물론 중요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세상의 법과 개별적으로, 독립적으로 따로 놓고 하느님의 법에만 맹목적인 신앙으로 초점을 맞추게 됐을 때 실제 현실인 신앙 공동체에서는 갈등 아닌 갈등이 일어나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런 문제점이 발생한다면 왜 그런 문제점이 발생했는지 그 이유를 철저히 고민해서 알아야만이 개인 한 사람에게도 신앙적으로 발전을 할 수 있을 것이고 또한 신앙 공동체도 더 성숙한 공동체가 될 것이라는 사실은 분명할 것입니다. 이런 관점으로 다시 오늘 복음을 한번 묵상해보시는 것도 색다른 묵상이 될 수 있으리라 봅니다. 감사합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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