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연중 제6주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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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조재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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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25-02-15 | 조회수133 | 추천수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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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을 검색하면서 재미있는 글을 읽었습니다. “뱀이 길을 가다가 ‘톱’에 약간 상처를 입었습니다. 화가 난 뱀은 톱을 노려보다가 물었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입에 큰 상처를 입었습니다. 기력을 회복한 뱀은 톱을 몸으로 칭칭 감았습니다. 톱이 숨을 멎도록 하였습니다. 결국 뱀은 톱에 몸이 잘려 죽고 말았습니다.” 뱀이 참 어리석은 것 같습니다. 만일 뱀이 처음 상처를 받아들이고 톱을 무시했다면 입에 상처를 입지 않았을 겁니다. 입에 상처를 입었어도 톱을 무시했다면 죽지는 않았을 겁니다. 뱀만 그럴까요? 저도 어릴 때 뱀처럼 행동한 적이 있습니다. 친한 친구와 장난하다가 친구가 저의 공책을 찢었습니다. 화가 난 저는 친구의 책을 찢었습니다. 친구도 화가 나서 제 연필을 부러트렸습니다. 저도 화가 나서 친구의 가방을 찢었습니다. 결국 선생님이 아셨고, 친구와 저는 무척 혼이 났습니다. 그냥 공책이 찢어진 걸 무시하고 친구에게 그러지 말라고 했으면 연필이 부러지는 일도, 책이 찢어지는 일도, 가방이 찢어지는 일도 없었을 겁니다. 선생님에게 혼나는 일도 없었을 겁니다. 욱하는 성격 때문에, 순간의 화를 참지 못해서 본인은 물론 가족에게도 큰 피해를 주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속담은 이렇게 말합니다. “빈대 잡으려다가 초가삼간 다 태운다.” 장자는 화를 참지 못하는 어리석은 사람에게 아주 좋은 글을 남겨 주었습니다. 제목은 ‘빈 배’입니다. “배로 강을 건널 때 빈 배가 다가와 부딪치면 비록 성급한 사람일지라도 화를 내지 않는다. 그러나 그 배에 사람이 타고 있으면 비키라 소리친다. 한 번 소리쳐 묻지 못하면, 다시 소리쳐 묻고 그래서 안되면 세 번 소리쳐 묻는다. 또 그래도 안 되면 나쁜 소리가 나오기 마련이다. 아까는 화내지 않고 지금은 화내는 까닭은 아까는 빈 배였고 지금은 사람이 타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 자신을 비우고 생의 강을 흐른다면 누가 해하겠는가.” 멀리 미국에 있지만 한국의 소식을 듣게 됩니다. 뉴스는 연일 정치에 관한 소식을 전합니다. 법과 원칙에 의해서 시비가 가려질 겁니다. 물이 흘러 바다로 가듯이 정해진 시간이 지나면 안정을 찾을 겁니다. 그럼에도 마음이 흔들리는 것은 저의 마음을, 빈 배로 만들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뉴스를 보는 시간에 성경 말씀을 듣고, 음악을 들으니, 마음이 한결 편해집니다. 본당에서도 그렇습니다. 쉽게 해결될 수 있는 문제도 감정이 생기면 일이 복잡해지곤 합니다. 작은 상처를 무시할 수 있다면, 나의 마음을, 빈 배로 만들 수 있다면 폭풍우 속에서도 평온을 찾을 수 있을 겁니다. 신앙은 먼저 행하면서 자라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먼저 주님의 말씀을 경청하면서 자라는 겁니다. 오늘 성서 말씀에서 우리는 행복의 기준을 보게 됩니다. 그것은 소유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원하는 것을 채우는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하느님을 믿고 따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제1독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주님을 신뢰하고 그의 신뢰를 주님께 두는 이는 복되다. 그는 물가에 심긴 나무와 같아 제 뿌리를 시냇가에 뻗어 무더위가 닥쳐와도 두려움 없이 그 잎이 푸르고 가문 해에도 걱정 없이 줄곧 열매를 맺는다. 행복하여라! 악인의 뜻에 따라 걷지 않는 사람, 죄인의 길에 들어서지 않으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는 사람, 오히려 주님의 가르침을 좋아하고, 밤낮으로 그 가르침을 되새기는 사람, 하는 일마다 모두 잘되리라.” 고통과 슬픔은 먹구름처럼 다가오지만 그것이 하늘의 태양을 없애지 못합니다. 하느님을 신뢰하는 사람은 고통과 슬픔 뒤에 밝게 드러나는 희망을 볼 수 있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걸어간 길입니다. 예언자들이 걸어간 길입니다. 성인과 성녀들이 걸어간 길입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가난, 고통, 죽음까지도 기꺼이 받아들였던 이 시대의 신앙인들이 걸어간 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도 행복은 소유함에 있지 않다고 선포하십니다. 가난할지라도, 슬픔 속에 있을지라도, 고통 중에 있을지라도, 박해를 받을지라도 하느님께 신뢰를 두는 사람은 행복하다고 하십니다. 하느님께서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그들의 슬픔, 고통, 아픔을 위로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부유할지라도, 성공했을지라도, 권력을 가졌을지라도, 풍족한 삶을 살고 있을지라도 하느님께 신뢰를 두지 않는 사람은 불행하다고 하십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날 때 가지고 갈 것은 재물, 권력, 명예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늘에 쌓아야 할 것은 사랑, 헌신, 나눔이기 때문입니다. 니체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멀리 있는 길을 항해하는 배가 폭풍을 만나지 않고 조용한 바다로만 갈 수는 없다. 멀리 있는 길을 항해하는 배에서 폭풍은 벗과 같은 것이다.” 어떤 분은 어쩌면 지금 삶의 먼 항해 길에 폭풍을 만나고 계실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지금 삶이라는 배가 험한 파도에 몹시 흔들리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삶의 여정에서 다가오는 폭풍우를 피하고, 그 폭풍우 벗어나기를 기도하기보다는 그 폭풍우를 이겨내고 그 폭풍우와 맞서 싸울 힘과 용기를 청할 수 있기를 기도하였으면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그 폭풍우의 한가운데서 우리와 함께하시는 주님을 만날 수 있고, 그 주님의 힘을 느낄 때 우리는 어떤 힘든 상황 속에서도 참된 삶의 기쁨과 행복을 맛볼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우리가 가야 할 곳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곳은 영원한 생명의 나라입니다. “현세만을 위하여 그리스도께 희망을 걸고 있다면, 우리는 모든 인간 가운데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셨습니다. 죽은 이들의 맏물이 되셨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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