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송영진 신부님_<‘행복론’이 아니라 ‘구원론’입니다.> | |||
---|---|---|---|---|
이전글 | 이전 글이 없습니다. | |||
다음글 | 나도 모르는 내 마음 속의 그 자리 | |||
작성자최원석
![]() ![]() |
작성일2025-02-16 | 조회수83 | 추천수2 |
반대(0)
![]() |
<‘행복론’이 아니라 ‘구원론’입니다.>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다. 행복하여라, 지금 굶주리는 사람들! 너희는 배부르게 될 것이다. 행복하여라, 지금 우는 사람들! 너희는 웃게 될 것이다.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면, 그리고 사람의 아들 때문에 너희를 쫓아내고 모욕하고 중상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그날에 기뻐하고 뛰놀아라. 보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사실 그들의 조상들도 예언자들을 그렇게 대하였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너희 부유한 사람들! 너희는 이미 위로를 받았다. 불행하여라, 너희 지금 배부른 사람들! 너희는 굶주리게 될 것이다. 불행하여라, 지금 웃는 사람들! 너희는 슬퍼하며 울게 될 것이다. 모든 사람이 너희를 좋게 말하면, 너희는 불행하다! 사실 그들의 조상들도 거짓 예언자들을 그렇게 대하였다(루카 6,20-26).”
1) 이 말씀의 ‘행복’은 구원받은 사람들이 누리게 될 영원한 기쁨과 영원한 행복을 가리키는 말이고, ‘불행’은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이 당하게 될 심판과 멸망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행복론’이 아니라 ‘구원론’입니다. <‘어떻게 하면 행복을 얻는가?’에 관한 가르침이 아니라, ‘어떻게 해야 구원받는가?’에 관한 가르침이라는 것입니다.>
2) 루카복음 16장에 있는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는 이 말씀을 생생하게 설명해 주는 비유입니다. 그 비유에 나오는 ‘라자로’는 아주 가난했고, 날마다 굶주렸고, 그리고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면서 날마다 울었을 것이고, 사람들로부터(나쁜 부자들로부터) 무시당하고 모욕당하면서 살았을 것입니다. 반대로, 그 비유에 나오는 ‘부자’는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살았습니다(루카 16,19). 그는 배고픔이 무엇인지도 몰랐을 것이고, 날마다 웃으면서 살았고, 주변 사람들의 아첨에 취해서 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두 사람의 처지는 저승에서 정반대로 바뀌게 됩니다. “부자가 저승에서 고통을 받으며 눈을 드니,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곁에 있는 라자로가 보였다. 그래서 그가 소리를 질러 말하였다. ‘아브라함 할아버지,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라자로를 보내시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제 혀를 식히게 해 주십시오. 제가 이 불길 속에서 고초를 겪고 있습니다.’ 그러자 아브라함이 말하였다. ‘얘야, 너는 살아 있는 동안에 좋은 것들을 받았고 라자로는 나쁜 것들을 받았음을 기억하여라. 그래서 그는 이제 여기에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초를 겪는 것이다. 게다가 우리와 너희 사이에는 큰 구렁이 가로놓여 있어, 여기에서 너희 쪽으로 건너가려 해도 갈 수 없고 거기에서 우리 쪽으로 건너오려 해도 올 수 없다.’(루카 16,23-26)”
3) 저승에 있는 ‘큰 구렁’은, 한 번 심판이 이루어지면 번복되지 않는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전능하신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에 변경과 취소는 없습니다. 그런데 사실 그 ‘큰 구렁’은 이승에서 이미 부자 자신이 만든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부자들과 가난한 사람들 사이를 막고 있는 ‘큰 구렁’은, 가난한 사람들의 힘으로는 도저히 건너갈 수도 없고 극복할 수도 없는 ‘현실적인 장벽’입니다. 이승에 있는 그 장벽은, 또는 그 ‘큰 구렁’은 부자들이 만든 것이고, 그것을 없애는 것은 부자들 자신들이 할 일입니다.
4) ‘가난’과 ‘굶주림’이 행복의 원인이 될 수는 없지만, 하느님 나라를 갈망하게 만드는 힘으로 작용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다.” 라는 말씀은, “지금 가난하더라도 좌절하지 않고, 또 재물에 눈을 돌리지 않고 하느님 나라만 추구하는 사람은 그 나라를 차지할 것이다.” 라는 뜻입니다. ‘라자로’가 가난하다는 이유만으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간 것이 아니라, 착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 나라에 들어간 것처럼, 단순히 가난하다는 이유만으로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니고, 하느님 뜻에 합당하게, 의롭게 살아야 그 나라에 들어갑니다. <가난하기 때문에 더 탐욕에 사로잡히는 경우도 있습니다.>
5) ‘부유함’은 그 자체가 ‘구원’을 방해하는 걸림돌이 됩니다. 사람들 중에는 “부자로 사는 것 자체가 죄는 아니다. 착한 부자도 많다.” 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런 주장을 하기 전에 먼저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더 쉽다(루카 18,25).” 라는 예수님 말씀을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 교회의 성인 성녀들 가운데에는 ‘부자였던’ 분들이 분명히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부자인 채로’ 성인품에 오른 분들은 없습니다. 인간적으로만 보면 ‘착한 부자’로 보이는 사람들이 있긴 한데, 예수님의 기준으로도 과연 ‘의인’으로 인정받을 수 있을지는 좀 더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착한 부자’ 라는 칭찬과 존경을 받는 것에 취하면 금방 교만해지고 위선자가 됩니다. 그것보다 더 큰 문제는 ‘부유함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부유함을 유지하려고 애쓸 때, 그것이 악한 일이 아니고, 죄가 되는 일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마음이 이미 재물 쪽으로 기울어져 있는 상태가 되어버리기 때문에 그만큼 하느님에게서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받는 방법’을 묻는 부자에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어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루카 18,22).” 라는 말씀은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살아 있는 말씀’입니다. <지금 부유하든지 가난하든지 간에, 누구든지 재물에 대한 애착심을 버리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출처] 연중 제6주일 강론|작성자 송영진 모세 신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