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연중 제6주일 다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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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박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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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25-02-16 | 조회수87 | 추천수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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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6주일 다해] 루카 6,17.20-26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다.“
[아무것도 가진 것 없고 / 아무것도 아는 것 없고 / 건강조차 없는 작은 몸이지만 / 나는 행복합니다. 배영희 엘리사벳 자매님이 쓰신 <나는 행복합니다>라는 시입니다. 자매님은 19살에 뇌막염을 앓고 난 후유증으로 앞을 못보는 전신마비 장애우가 되셨지요. 온 몸이 마비된 채 침상에 누워있을 수 밖에 없는 상황인데도 항상 맑고 밝은 모습으로 행복하게 지내셨다고 합니다. 그런 자매님의 모습을 보며 행복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됩니다. 우리는 남들보다 더 나은 조건을 풍족하게 갖춰야만 행복해질 수 있다고 생각하며 그 행복의 조건을 채우기 위해 애쓰고 있는데, 정작 ‘나는 행복하다’고 말하는 이들은 찾아보기 힘든 것을 보면 말이지요. 오늘의 제1독서에서 예레미야 예언자가 우리에게 참된 행복을 결정하는 분명하고도 확실한 기준에 대해 알려주고 있습니다. 남들이 다 부러워할만한 조건들을 풍족하게 갖추고 있음에도 불행하게 사는 이들을 보면 행복은 ‘소유’에 달린 문제가 아니지요. 예레미야는 그 점을 날카롭게 지적합니다. 돈, 명예, 권력을 얻기 위해 자신의 육체적이고 세속적인 능력을 키우는데에만 신경쓰는 이들, 행복의 조건들을 채우는데에 도움이 될 것 같은 이들과의 관계맺음에 집착하며 그들 눈치를 보는 이들은 행복해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마음이 주님에게서 떠나있기’ 때문입니다. 반면 주님 사랑의 섭리를 굳게 믿고 그분 자비를 신뢰하며 그분께 온전히 의탁하는 이들은 ‘복되다’고 합니다. 그들이 하느님으로부터 ‘축복’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그렇기에 물가에 심긴 나무가 시냇가를 향해 뿌리를 뻗듯이, 주님의 축복 속에 사는 이들은 그분을 향해 믿음과 순명의 뿌리를 뻗음으로써 고통을 마주하더라도 두려워하지 않고 당당하게 맡은 바 소명을 다하며, 시련을 겪더라도 걱정하지 않고 신앙생활의 열매인 참된 기쁨을 충만하게 누린다는 겁니다. 그러니 ‘행복의 조건’을 갖추겠다며 스스로를 좁디 좁은 세상의 화분 속에 가둘 게 아니라, 믿음과 순명의 뿌리를 주님께 뻗어 그분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은총의 강물이 내 안에 스며들게 해야겠지요. 예수님께서 “가난한 사람들”을 두고 “행복하다”고 선언하시는 것도 그런 의미에서입니다. 재물은 우리에게 행복할 기회를 제공하기는 하지만 그 자체가 행복은 아니지요. 우리로하여금 삶의 참된 기쁨을 충만하게 누리게 하는 진짜 행복은 오직 하느님으로부터만 나옵니다. 하느님은 온 세상을 창조하신 다음, 당신 모습대로 인간을 만드시고 ‘복’을 내리셨습니다. 그리고 당신께서 만드신 피조물들을 ‘다스리라’는 소명을 맡기셨습니다. 즉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 손에 맡기신 피조물들을 그분 뜻에 맞게 잘 사용하여 선을 이루는 한편, 그것들을 도구로 활용하여 하느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내리신 ‘축복’을 완성해야 하는 임무를 받은 겁니다. 그런데 많은 이들이 재물을 다스리지 못하고 그 재물에 마음과 영혼이 온통 사로잡힌 ‘노예’로 살고 있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노릇입니다. 참된 행복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시면서 이미 내려주신 축복을 완성함으로써만 누릴 수 있고, 그 축복을 완성하는 방법은 그분의 뜻을 충실히 실천하는 것 뿐인데, 엉뚱한데서 행복의 조건들을 찾고 있으니 예수님은 그런 우리가 올바른 방향을 바라보도록 이끌고자 하십니다. 우리가 지향해야 할 것은 조건의 행복이 아니라 인간 존재로서 받은 축복이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으로부터 그 축복을 가득히 받기 위해서는 ‘가난’, 즉 세속적인 것들의 결핍을 견디려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 마음에 하느님을 모시기 위한 ‘빈 자리’를 마련해야 그분께서 우리 안에 들어오시어 큰 은총과 복을 베풀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비로소 우리 마음은 삶의 참된 기쁨을 충만하게 누리게 되는 것이지요. 예수님이 말씀하신 ‘가난’은 ‘참된 행복’에 대한 각각의 내용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개념입니다. 여기서 ‘가난한 이’이라고 번역된 그리스어 ‘프토코이’는 가진 게 아무 것도 없어 생존하려면 하느님의 자비에 철저히 의존할 수 밖에 없는 이들을 가리킵니다. 즉 그들은 하느님만을 의지한 채 그분 손을 꼭 붙들고 있는 이들로써, 하느님께서 그들 곁에 함께 계시며 보호하시고 보살피시지요. 그들은 세상의 것들에 마음이 갈라지지 않고 하느님과 온전히 일치되어 있기에 이 세상에서 이미 하느님 나라를 누리게 되는데, 그것이 그들로 하여금 참된 행복을 누리게 하는 원동력이 됩니다. 즉 그들은 자신이 살면서 겪는 모든 일들을 하느님의 뜻으로 받아들이기에 굶주려도 슬퍼도 사람들로부터 미움과 박해를 받아도 근심 걱정으로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또한 하느님께서 그 어떤 난관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을 구원과 참된 행복으로 이끄시려는 당신 뜻을 이루실 것을 알기에 그 믿음과 희망으로 언제나 기쁘게 살 수 있는 것이지요. 반대로 부유한 사람들은 그런 것들을 누리지 못합니다. 그들은 하느님께서 계셔야 할 자리를 세상의 물질적인 것들로 ‘이미’ 채워버렸기 때문입니다. 그것들이 주는 일시적이고 유한한 만족감이 그들이 누릴 수 있는 기쁨의 ‘최대치’로 이미 정해져있는 탓에, 그들의 앞에는 ‘내리막길’만이, 실망과 좌절만이 기다리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 지금 배부르고, 웃으며, 인기와 명예를 누려도 늘 마음 한 구석이 찝찝하고 불안하지요. 다른 이들에 비해 행복할 수 있는 조건들을 더 갖추고 있는 유리한 상황임에도 삶의 참된 기쁨을 맘껏 누리지 못하고 마음이 주눅든 채 살아가는 안타까운 모습입니다. 이것이 행복선언에 숨어있는 ‘역설’입니다. 그리고 우리 삶은 그런 역설들로 가득하지요. 가만히 생각해보면 살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행복했던 순간은 참으로 아이러니하게도 고생하고 고통받으며 슬픔을 겪던 순간이었습니다. 고생이 컸던 만큼 그 일을 통해 느낀 보람도 컸기 때문입니다. 고통스러웠던 만큼 그것을 잘 극복하고 얻은 결실이 더 소중하게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슬픔이 깊었던만큼 내가 힘들 때 곁에 있어주고 위로해주며 힘을 주는 이들이 있음에 더 감사할 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행복의 역설’을 깨닫기 위해 필요한 것이 주님께 대한 깊고 단단한 믿음입니다. 주님께서 누구보다 나를 깊이 사랑하시며, 그분께서 하시는 모든 일은 나를 구원과 참된 행복으로 이끌기 위한 것임을 믿어야 그분께서 우리 삶 구석구석에 숨겨두신 ‘행복의 씨앗’들이 싹을 틔우고 자라 기쁨이라는 열매를 맺습니다.
* 함 승수 신부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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