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 자신의 십자가 진 자만이 행복의 길을 / 연중 제6주간 금요일(마르 8,34-9,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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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박윤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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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25-02-20 | 조회수74 | 추천수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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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자신의 십자가 진 자만이 행복의 길을 / 연중 제6주간 금요일(마르 8,34-9,1) 신자 수가 늘어난 만큼 주님의 참된 길 걷는 이들이 늘지 않았다는 것을 우리는 여러 체험으로 실감한다. 이는 분명 우리 신앙의 위기가 심각한 뜻일 게다. 과학이 발전하고 로봇이 일상의 많은 영역을 대신해 주면 인류는 행복해질 것이라 여긴다. 하지만 그런 혁명의 혜택은 오늘날의 자본주의 시대에 자산과 권력 가진 이들에게만 돌아가는 특혜가 되기 쉽다. 공정한 분배와 바른 민주의식이 전제되지 않는 한 과학의 혜택도 사회의 양극화 현상만 첨예화할 수도.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군중을 가까이 불러 이르셨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목숨 구하려는 이는 잃을 것이고, 나와 복음 때문에 잃는 이는 구할 것이다. 온 세상을 얻고도 목숨 잃으면 소용이 있느냐? 제 목숨을 무엇과 바꿀 수가 있을까? 절개 없고 죄 많은 이 세대에서 나와 내 말 부끄럽게 여기면, 사람의 아들도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 사실 예수님 제자의 길 걷는다는 게 무엇인지에 대해 진지한 고민 그 자체가,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매우 낯선 지경이다. 그것은 신자, 곧 그리스도인이라는 의식과 그분 제자의 길이 일치할 필요 없다는 생각을 은연중 가졌기에. 이는 십자가 지고 예수님 따르지 않아도 의당 신앙인이 될 수 있다는 이들이 많아진 게, 오늘 교회가 겪는 여러 갈등의 뿌리인지도 모를 게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길을 분명히 제시하셨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무한 경쟁에서 목숨 구하려고 남 짓밟는 일이 반복되는 한, 인류는 결코 하느님 나라를 체험할 수 없다. 죽길 작정하고 숨길 약점이 있는 한 더하다. 십자가 질 때는 이웃을 용서하고 함께 할 게다. 하느님 나라는 십자가를 서로 져 주는 나라다. 이후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수난을 예고하셨다. 그러자 베드로가 그 수난의 길을 막자,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 일은 생각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라고 엄히 꾸짖으셨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그분을 믿는 거다. 곧 그분께서 하시려는 게 옳다고 믿는 행위이다. 그래서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인간적인 계산을 넘어서는 거다. 이렇게 예수님 따름은 그분 사랑하는 거고, 그 사랑은 그분 닮는다는 것이리라. 예수님께서는 당신 따르라시면서 “제 십자가를 져라.” 라고 단서를 다셨다. 이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대열에 참여하여, 오늘의 내 삶의 현장에 능동적이어야 한다는 말씀이다. 이를 그대로 받아들이면 죽음의 길을 가자는 거나 마찬가지다. 오해나 박해를 감당할 모험이나 투신 없이는 예수님께서 걸으신 십자가의 길을 제대로 따라갈 수 없으니까. 이처럼 십자가 지고 그분 따르려면, 이 세상서 이방인처럼 살아야 한다. 그러기에 십자가의 삶은 고독할 게다. 예수님께서는 “자기 목숨 구하려는 이는 목숨 잃을 것이고, 당신과 복음 때문에 목숨 잃는 이는 구할 것이다.” 라고 하셨다. 죽고 사는 것에 연연지 말라는 거다. 그러기에 자신의 십자가를 피하지 말라셨다. 누구에게나 자기 몫의 십자가가 있다. 그게 무엇이든 결국 영원히 사는 거라면 지지 못할 십자가는 없다. 지금 바로 그 십자가 끌어안자. 그분 제자 되고자 그 십자가 붙들자. 예수님 말씀 하나하나 실천해 가며, 그 십자가 진자만이 참 행복의 길을 걷으리라.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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