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 용서는 남보다 나에 대한 사랑에서 / 연중 제7주일 다해(루카 6,27-38)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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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박윤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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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25-02-22 | 조회수66 | 추천수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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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용서는 남보다 나에 대한 사랑에서 / 연중 제7주일 다해(루카 6,27-38)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원수를 사랑하여라. 미워하는 이들께 잘해 주고, 저주하는 자들에게 축복하며, 학대하는 자들을 위해 기도하여라. 뺨을 때리는 자에게 다른 뺨 내밀고, 겉옷 가져가는 자는 속옷도 가지게 버려 두어라. 달라면 주고, 가져간 이에게서는 되찾으려 하지 마라.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해 주어라. 심판하지 마라. 그러면 심판받지 않을 것이다. 단죄하지 마라. 그러면 단죄 받지 않을 것이다. 용서하여라. 그러면 용서받을 것이다. 주어라. 그러면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되어 되받을 것이다.”’ 예수님의 사랑 실천 방법은 이웃과 원수 사랑이다. 이웃을 제 몸처럼 사랑하라는 것도 이해가 어렵지만, 원수까지 사랑하고 그의 원을 다 들어주어야 한다는 건 참으로 충격이요 역설적이다. 왜냐면 보통은 이와 전혀 달리 삶을 살고 믿음의 생활을 하기에. 오히려 악에 맞서 싸우고 응징함으로써 멋있고 정의를 세우는 게 훨씬 마음에 와 닿고 실천도 더욱 쉬울 것 같기에. 그러나 이 이웃과 함께 원수 사랑의 예수님 가르침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역사 안에서 언제나 옳았다는 것 같다. 이렇게 그분의 가르침이 있었기에 인권이 존중되고 인간 존엄성이 지켜져 왔음을 볼 수 있다. 정의를 빙자한 폭력과 권력은 인권과 인간 존엄성을 파괴하는 부작용만을 낳을 뿐이었다. 예수님께서 실현하신 하느님나라는 결국 악에 대한 선의 승리를 뜻한다. 그래서인지 “원수를 사랑하라.” 라는 예수님의 이 말씀은 우리 신앙인들에게 늘 이상적인 가르침이다. 실제로 원수를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은 우리 본성이 아닌 것처럼 느껴진다. 원수에 대한 사랑이 어려운 것은 그 가해자에 대한 증오심을 거두어들이는 것도 어렵지만, 그에 대해서 용서가 말이나 생각처럼 잘 되지 않기에. 결국 원수를 용서하고 사랑하는 것이 어려운 것은, 바로 나의 온 마음이 그 가해자에 대해서 보복과 증오의 감정이 가득하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용서는 거창한 게 아닌 작고 소박한 거라고 여기면, 용서하는 그 자체는 그리 어렵지 않단다. 곧, 상대의 죄를 사면해 준다거나 그와 화해하는 행위 또 나아가 그를 사랑해야 하는 게 용서라고 생각지 않는다면, 용서하기가 쉬워진다는 거다. 일단 원수에 대해서 용서의 첫걸음을 옮기는 것이 대단히 중요한데 이는 원수에게 복수하겠다는 마음의 포기에서 시작할 게다. 그리고 용서는 그 상대를 위해서가 아닌, 바로 자신을 위한 것임을 깨달아야만 쉬우리라. 물론 원수를 사랑한다는 것, 곧 원수를 용서하고 그를 위해 기도하는 게 어찌 쉬울 수가 있을까?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그 이상으로 해 주어라.” 하시며, 남에게 베푼 그대로 우리에게 분명히 되갚아 주실 것이란다. 아니 우리가 준 것보다 더 후하게 베푸시겠단다. 사랑받기보다는 주려고 애쓰는 신앙인이 되어야겠다. 따라서 자신을 위해 용서하는 거지, 상대를 위한 게 아님을 알자. 이렇게 나를 위해 용서할 때, 궁극적으로는 원수에게도 용서가 쉽게 이루어 질 수 있을 게다. 하느님 앞에서 아무 죄 없이 설 이 과연 있으랴? 그러나 그분께서는 죄 많은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신다. 그리고 당신 아드님의 그 십자가로 우리를 끊임없이 구원에 초대하신다. 성체로 주님 사랑 체험한 우리는 용서하는 넓은 마음으로 주님의 크신 자비에 감사해야 할게다. 용서는 나에 대한 큰 사랑이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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