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연중 제8주일 다해]
이전글 이수철 프란치스코신부님 -마음의 곳간을 잘 관리하기 “주님을 사랑하라” |2|  
다음글 03.02. (연중 제8주일 ) 한상우 신부님  
작성자박영희 쪽지 캡슐 작성일2025-03-02 조회수106 추천수4 반대(0) 신고

[연중 제8주일 다해] 루카 6,39-45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벌써 20년도 훌쩍 넘은 일입니다. 1988년 한국 천주교회는 “내 탓이오 운동”을 전개했습니다. 당시 한국사회에 만연했던 반목과 갈등, 그리고 분열과 다툼이 자기 잘못은 생각하지 않고 모든 책임을 남의 탓으로 돌리는 마음자세 때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인부터 솔선수범하여 남탓이 아니라 자기 성찰을 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이 세상을 하느님 보시기에 좋은 모습으로 변화시켜 나아가고자 한 것이지요. 이런 계몽 운동을 시작한 것은 천주교였지만, 언론과 방송에서도 주목하여 소개하였고, 그 취지에 공감한 많은 이들이 호응하며 동참했었습니다. 오늘날 한국사회는 그때보다 훨씬 더 심각한 상황입니다. 남의 말을 들어볼 생각은 하지 않고 자기 하고 싶은 말만 하려고 합니다. 상대방에 대한 이해와 존중, 배려의 자세는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나와 의견이 다른 이들은 그냥 ‘적’으로 간주하고 폭력적인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자기 의견을 일방적으로 관철시키려는 강압적인 태도를 보입니다. 범국민적인 “내 탓이오 운동”이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한 시기이지요. 20여년전 그때처럼 지금도 우리 먼저 시작하면 좋겠습니다. 미사의 시작예식 때마다 바치는 “고백 기도”의 내용처럼 나 자신이 한없이 부족하고 약한 죄인임을 솔직히 인정하고 고백하며 하느님 아버지께는 자비를, 성모님과 모든 성인들에게는 전구를 청해야겠습니다.

 

오늘 복음은 그런 우리에게 예수님께서 보내시는 성찰과 통회의 메시지입니다. 부족하고 약한 우리가, 그래서 자꾸만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죄로 마음이 기울어지는 우리가, 참된 그리스도인답게 그리고 온전한 하느님 자녀답게 살기 위해서는 지속적으로 자기 삶을 돌아보고 잘못을 깊이 성찰함으로써 부족한 부분은 채우고 잘못 틀어진 방향을 되돌리는 작업이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너나 잘 하세요!”라는 어느 영화 속 대사처럼, 자기성찰과 변화를 위한 노력을 게을리하는 사람은 다른 이의 잘못을 비판할 자격도 단죄할 권리도 없습니다. 그러니 다른 이를 내 기준으로 저울질할 생각 말고, 먼저 나 자신이 그 저울 위에 올라가봐야 합니다. 회개와 성찰은 나 자신부터 먼저 시작해야 합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라는 비난과 원망의 마음이 아니라 ‘나라도 그랬을거야’라는 공감으로, ‘나도 언제든 그럴 수 있어’라는 경각심으로, ‘나는 그렇게 하지 말아야지’라는 단호한 의지와 결심으로 그 사람을 바라봐야 합니다. 그러면 그를 누군가에게 피해와 상처를 입힌 ‘죄인’으로 만들지 않고, 나를 올바른 길로 이끌어주는 훌륭한 ‘반면교사’로 삼을 수 있습니다. 그것이 그와 나 모두에게 가장 좋은 길이겠지요.

 

그러나 정말 그렇게 하기는 참으로 어렵습니다. 사람의 마음은 자기 자신을 향하기 때문입니다. 타인의 잘못에 대해서는 엄격한 도덕적 잣대를 들이대며 비난하고 단죄하면서도, 자신의 잘못에 대해서는 한 없이 관대한 모습을 보이는 겁니다. 자신의 부족함과 과오를 솔직하게 인정하기 어려운 건 기본이고 제대로 마주하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어떻게든 자기 잘못을 감추려고 하고, 감추어지지 않는 부분은 그럴 수 밖에 없었다고 합리화하며, 다른 사람들도 다 그랬을 거라고 정당화하기도 하지요. 그렇게 하는 것은 내가 보고 싶은대로만 보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드러내 보이고 싶은 ‘이상적’ 모습에 나의 ‘현실적’ 모습을 억지로 끼워맞추려고 하다보니, 실제로는 선하지 않은데도 선한 척, 의롭지 않은데도 의로운 척 하게 되는 겁니다. 그런 삶이 행복할 리 없지요. 이상과 현실의 괴리가 커질수록 스스로에 대한 실망과 자괴감도 커지고, 결국엔 자기 자신을 부정하기에 이릅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장 경계하라고 하시는 ‘위선자’의 모습입니다.

 

그렇게 되지 않으려면 보고 싶은대로만 보려고 하지 말고, 주님께서 보여주시는대로 봐야 합니다. 그러면 내 눈에 들보가 박혀 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고, 다른 사람들의 모습을 왜곡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보게 될 것입니다. 먼저 스스로를 돌아보고 자신의 참된 모습을 바라볼 수 있어야, 다른 사람이 지닌 참된 모습을 알아볼 넓고 깊은 ‘안목’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그런 안목을 지닌 사람은 남이 저지르는 실수와 잘못을 지적하기보다 같이 마음 아파하고, 그가 그것들을 바로잡을 수 있도록 도와주며, 정말 필요한 경우에만 그의 심정을 충분히 헤아린 뒤 겸손과 사랑의 마음으로 그에게 진심어린 충고를 해 줍니다. 그를 ‘남’이 아닌 ‘형제’로 바라보기에 그의 눈에 박힌 티를 제대로 보고 빼줄 수 있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참된 ‘형제애’의 모습입니다.

 

결국 모든 문제는 내 마음 안에 있습니다. 내 마음이 맑고 평화로우면 내가 만나는 사람이 예수님으로, 천사로 보이는데, 내 마음이 죄악의 어둠과 악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으면 내가 만나는 사람이 사탄으로, 원수로 보이는 것이지요. 그러니 지금 내 눈에 나쁜 사람으로, 상종 못할 죄인으로 보이는 사람이 있다면, 잠시 눈을 감고 주님의 뜻과 가르침에 비추어 나 자신을 돌아보십시오. 그러면 내 마음 깊숙이 박혀있는 죄의 들보가 보일 겁니다. 상태가 그 지경에 이르도록 방치한 스스로의 안일함과 나태함을 깊이 반성하며 통회의 ‘내 탓이요’를 꾸준히 반복하다보면 위선과 교만으로 뿌옇게 가려졌던 눈이 맑아져 자기 자신과 이웃의 참된 모습을 알아보게 되지요. 그러면 비로소 깨닫게 될 겁니다. 이 세상에 선하기만 한 사람도 없고 악하기만 한 사람도 없다는 것을. 각자가 선택의 순간을 마주했을 때 마음에 있는 ‘선한 곳간’ 쪽 문을 여는지 아니면 ‘악한 곳간’ 쪽 문을 여는지에 따라 결과가 달라질 뿐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 선택은 어느 날 갑자기 우연처럼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 불이익과 희생을 감수하고서라도 꾸준히 선한 곳간의 문을 열었던 경험이 반복되어 습관이 되고 삶이 됨으로써 ‘관성’(慣性)처럼 떠밀리듯 이루어진다는 것을. 그렇기에 평소에 잘 하는 게 중요하다는 것을.

 

그러니 평소에 남의 눈에 있는 티끌을 찾는 일보다, 내 눈에 박힌 들보를 있는 그대로 보고 빼내는 일에 더 집중해야겠습니다. 그렇게 할 수 있는 힘은 ‘호의’, 즉 상대방을 진심으로 위해주는 마음, 그가 잘 되기를,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기를 빌어주며 축복하는 마음에서 우러나옵니다. 예수님께서 바로 그런 마음으로 나를 바라보고 계십니다. 그것을 아는데도 불구하고 자꾸만 다른 이의 과오와 부족함이 먼저 보여 불편하다면, 그런 점들을 ‘뒷담화’하고 싶은 욕망이 마음에서 꿈틀거린다면 마음을 더 독하게 먹어야 합니다. 그저 단죄를 하지 않는, 뒷담화를 하지 않는 것을 목표로 삼는 소극적인 수준에 머무를 게 아니라, 다른 이에게 자비와 선을 실천하는 적극적인 수준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자비는 심판을 이깁니다.”(야고 2,13) 

 

* 함 승수 신부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태그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26/500)
[ Total 27 ] 기도고침 기도지움
등록하기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파일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