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천국문의 패스워드는 자신이 진 십자가에 있을 겁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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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강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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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25-03-06 | 조회수71 | 추천수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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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은 너무나도 잘 아는 내용의 복음입니다. 단순한 명제처럼 보이는 말씀이지만 이 말씀 속에 숨어 있는 보화는 끊임없이 샘솟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또한 제자입니다. 예수님은 스승님이신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스승이라는 말은 선생이라는 말의 어원과 같은 맥락에서 연유한 것입니다. 선생이라는 말은 액면적인 뜻만을 언급할 때는 먼저 살았다는 뜻과 함께 또한 먼저 경험했기 때문에 뭔가를 가를치고 지도할 수 있는 역량을 가진 사람을 말할 때도 사용하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먼저 살았다고 해서 누구나 다 그런 자질을 가진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런 파워가 있기 때문에 그런 분 앞에서는 존경과 경의를 표하며 예를 다해서 존경을 하는 것입니다. 제자가 된다는 것은 단순히 어떤 스승 밑에서 수학만 했다고 해서 제자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진정한 의미의 제자는 스승의 가르침을 받고 그 가르침대로 행동을 하고 그렇게 살아야 진정한 제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가르침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습니다. 지식도 있을 수 있고 지혜도 있을 수 있습니다. 지식은 많은 사람들이 수긍을 할 수 있는데 지혜는 조금 수긍이 되지 않을 수 있을 겁니다. 왜냐하면 지혜라는 것은 뭔가 가르쳐서 생기는 게 아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맞는 말이긴 하지만 완전히 맞는 말은 아닙니다. 사실 지혜의 원천은 지식이 기반 된 상태에서는 더 잘 나오는 법이기 때문에 지혜로운 사람이 되는 것도 좋은 제자가 될 수 있는 덕목이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지식과 지혜 둘 중 어느 하나를 선호하신다고 한다면 어떤 것을 더 선호하셨을까요? 지혜를 더 선호하셨을 것입니다. 왜 이런 추론을 할 수 있는가 하면 예수님은 그 당대 사람들의 수준에서 하느님의 나라와 또 하늘나라의 법치를 알려주시는 게 단순히 오늘날 학교에서 지식을 전해주는 그런 모습으로는 잘 전달될 수 없었기 때문에 누구나 알 수 있는 자연현상이라든지 아니면 살아가는 주위 환경을 통해 그 속에 하느님 나라의 비밀을 설명해 주셨습니다. 그 비유 속에는 어떤 것은 분명하게 구체적으로 그 모습을 유추할 수 있는 것도 있지만 오늘 복음에 나오는 말씀은 일반적인 비유가 아닌 다른 비유입니다. 이 비유의 상관관계는 바로 십자가와 천국이라는 두 대상이 비유의 대상입니다. 비유의 화법을 든 것은 아니지만 분명한 비유입니다. 이제 그게 왜 비유이고 이게 비유라면 어떤 의미가 숨어 있는가 하는 것을 묵상해보겠습니다.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는 사람이 되려면 먼저 자신을 버리고 그 다음은 제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이 두 행위는 동시동작일 수도 있을 수 있고 아니면 선후관계일 수도 있습니다. 전체적인 의미를 본다면 선후관계가 좀 더 합리적일 것 같습니다. 다시 말하면 십자가를 진다고 해도 자신을 버리지 않으면 별 의미가 없는 것이 됩니다. 또한 자신을 버린다고 해도 십자가를 지지 않으면 그 또한 의미가 없게 될 것입니다. 사실 두 가지 다 모두 쉽지 않은 것입니다. 아마 많은 사람들은 둘 중 어떤 게 더 어려워할 것 같은가 하고 질문을 한다면 대개 후자가 될 것입니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십자가라는 것은 피할 수만 있으면 피하고 싶은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다른 글에서도 언급을 한 적이 있습니다만 굿뉴스에 올라오는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이 예전에 고성 수도원에 계셨을 때 제가 영세 받고 아마 1년인가 2년 후쯤 언젠가 면담을 수도원 정원에 있는 방갈로에서 했는데 그때 신부님께서 지나가시는 말씀으로 십자가를 언급하셨는데 십자가의 원어의 의미는 품는 것이라고 설명하셨습니다. 어느 날 저는 원문은 모르지만 영어 성경을 보니 이해가 됐습니다. 영어에서는 받아들인다는 의미로 사용이 됐기 때문입니다. 이것만 놓고 봤을 때 그럼 십자가를 진다는 의미를 원론적인 의미로만 한정을 해서 보면 십자가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받아들인다의 의미와 진다의 의미는 사실 의미에 있어서 큰 차이가 있습니다. 마치 받아들인다는 것은 순명과 같은 것입니다. 진다는 것은 하긴 하는데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복종과 같은 의미입니다. 실제 마음은 하고 싶지는 않은데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해야 하는 그런 상황에 놓여 있을 때 취하는 행동이라고 보면 아마 적절한 비유가 될 것입니다. 지금까지 수많은 십자가에 대한 묵상을 해봤지만 오늘은 좀 다른 묵상을 하고 싶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골치 아프고 피하고 싶은 그 십자가가 만약 우리가 시간의 좌표를 순간이동을 해 지금 천국에 있다고 가정을 한번 해보겠습니다. 그럼 지금 있는 곳은 천국입니다. 천국에서 다시 지상의 시간으로 백해서 되돌아 봤을 때 지상에서 있을 땐 몰랐는데 천국에서 봤을 때 그 십자가가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십자가가 아니고 그 십자가 속에 천국문의 비밀번호가 있다고 한다면 우리는 이 십자가를 소유하고 싶을까요? 아니면 소유하고 싶지 않을까요? 댱연히 소유하고 싶을 것입니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그럴 겁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천국문 앞에 가도 천국문을 열 패스워드를 모른다면 천국문 앞에 있어도 천국은 머나먼 나라가 될 것입니다. 그래서 천국을 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서든지 패스워드를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근데 중요한 것은 하느님은 자기만의 천국 비밀번호를 자기가 지어야 할 십자가 속에 숨겨 놓으셨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 비밀번호는 누구도 대신 해서 알아줄 수 있는 게 아닌 것입니다. 근데 또 중요한 것은 여기서도 하느님께서 자신이 지는 어떤 불특정 십자가 속에 새겨 놓으셨는가 하면 그렇지도 않으신 것입니다. 그나마 새겨놓으셨다면 그 번호를 어떻게 십자가를 지고는 싶지는 않지만 비밀번호를 알 욕심으로라도 순간은 어떻게 참고 지어보려고도 할 것입니다. 근데 하느님은 그렇게는 하시지 않으셨을 겁니다. 이 세상에서 자기가 지어야 할 십자가가 이미 우리가 이 세상에 오기 전에 다 배정을 해 놓으셨을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배당된 그 십자가를 지려고 할 때 그때 하느님께서 하느님 나라의 패스워드가 하나의 퍼즐이 맞춰지는 것처럼 알 수 있게 하시지 않았을까 생각해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의 삶을 이렇게 비유를 한다면 어떨까요? 바로 우리는 이 세상을 사는 동안 마치 천국문의 패스워드를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자기가 알아야 하는 숙제를 우리 각자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주신 것이라는 묵상을 해보면 마치 그럴 것 같다는 묵상을 해보게 됩니다. 이 비밀번호는 이미 하느님께서 누구도 대신할 수 없도록 배타적인 권리로 설정을 해놓으셨기 때문에 그 비밀번호를 어떻게 스스로 알아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젠 선택을 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배정해 주신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그 비밀번호를 해독해 천국을 입성하느냐 아니면 지는 게 힘들어서 그냥 지지 않고 천국을 가는 걸 포기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하느님은 전혀 답답하시지 않으실 것입니다. 사람을 창조하시고 자유의지를 주신 것처럼 이 선택에도 우리의 자유의지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은 우리에게 주어진 십자가의 의미를 잘 알 수 없기 때문에 그 십자가를 사랑할 수 없고 피하고 싶은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실제는 십자가는 고통이 아니겠지만 설령 그게 고통이라고 한다고 해도 그 십자가를 그렇다면 왜 하느님께서 고통이라는 걸로 우리를 힘들게 하시려고 그렇게 하셨을까를 묵상해본다면 그건 절대 그럴 리가 없다는 걸 알 수 있을 겁니다. 만약 그렇다면 이미 그 하느님은 하느님이 아니실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은 잘 이해를 할 수 없다고는 하지만 모르긴 몰라도 그 십자가 속에 하느님만의 사랑법이 있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그렇다면 십자가는 마냥 나쁜 것처럼 생각하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를 것입니다. 왜 그냥 쉽게 알려주시면 좋을 텐데 하고 말입니다. 그건 아마도 그럴 겁니다. 세상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쉽게 얻어진 것은 쉽게 나가는 법이듯이 쉽게 천국을 간다고 한다면 그렇게 해서 간 천국이 진정한 천국의 가치를 발휘할 수 있을까를 묵상해보면 답은 나오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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