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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단순히 굶는다고 단식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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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강만연 쪽지 캡슐 작성일2025-03-07 조회수57 추천수3 반대(0) 신고

 

 

만약 누군가로부터 선물을 받게 된다면 그 선물의 가치는 어디에 있을까요? 포장지에 있을까요? 아니면 포장지 안에 있는 선물 그 자체에 있을까요? 질문 자체가 시시한 질문이라는 걸 다 알지만 이와 같은 현실에서는 이걸 잘 인식하는데 상황은 이와 같은데도 다른 데에서는 전혀 이런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자신을 드러내보이고 싶은 욕구가 있습니다. 그것 자체가 나쁘다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인간은 그런 경향이 있다는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책임을 어찌 보면 하느님께도 돌릴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창조주께서 그렇게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애초에 항상 겸손한 사람처럼 살 수 있도록 창조를 하셨더라면 말입니다. 논리적으로 말하면 이런 말을 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할 수 없는 이유도 있습니다. 왜일까요? 재미있게 표현하자면 그건 엿장사 마음입니다.

 

오늘 복음의 소재는 단식이고 주제는 진정한 의미의 단식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걸 알아야 한다는 내용이 숨어 있는 주제입니다. 우리가 계명을 지키기 위해 단식을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단식의 일차적인 의미는 음식 섭취를 어느 일정 기간 동안 끊는 행위입니다. 계를 지키는 측면에서는 이와 같은 일차적인 행동을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아무리 이렇게 해도 그 본질의 의미를 충족시키지 못한다고 한다면 그렇게 해서 한 단식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단순히 일차적인 의미에서의 단식도 그 나름의 의미도 있습니다. 실제 단식을 하면 인체 내에서 처음엔 힘들겠지만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인체 내에 있던 불순물 같은 게 신체 내에서 정화가 되는 부분도 있고 그렇게 되면 정신도 맑아지는 것도 사실이긴 합니다. 이건 단식의 본질을 논하기 이전에 이미 기본 베이스가 되는 사실입니다. 실제 진정한 단식은 이 이후에 있습니다. 이렇게 하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아는 게 더 중요한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단식을 통해서 육체와 정신 모두 정화를 하는 의미도 있을 것입니다. 또 다른 중요한 의미를 찾자면 이와 같은 행동을 통해서 내 주위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을 돌아보자는 의미도 있을 겁니다.

 

좀 더 확장을 하자면 그렇게 절제해서 그 절제된 몫을 가난한 이웃과 아니면 다른 사람을 위해 쓸 수 있는 몫으로 남겨두는 것도 중요한 의미일 것입니다. 사실 이와 같은 의미의 단식도 어찌 보면 유아기적인 신앙 안에서 단식이 될 것입니다. 진정한 의미의 단식은 오늘 독서에서도 그 일부가 나옵니다. 오늘 독서와 같이 복음과 묶어 진정한 의미의 단식이 무엇인지를 묵상해본다면 그것도 정답은 하나로 정의될 수 없겠지만 나름 의미를 굳이 찾자면 다음과 같은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가장 일반적인 답이기도 하고 또 광의의 의미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어쩌면 가장 정확한 정답이 될 수도 있을 명답이 바로 사랑 실천입니다.

 

독서에 이런 게 진정한 단식이 되지 않겠느냐 하며 각각의 예를 든 사례를 사랑 실천이라는 것과 각각 일대일로 대입해서 생각해보면 어느 하나라도 맞지 않은 게 없습니다. 이 말은 실제 표현은 하지 않았지만 행간 속에 숨어 있는 의미를 유추해보자면 아무리 육적으로는 단식을 해도 그 단식 그 자체에도 사랑이라는 명분이 없는 단식이라면 사실 우리가 사순 시기에 아는 단식의 의미를 우롱하는 처사가 될 것입니다. 많은 사례가 있겠지만 독서에 나오는 것 중 하나만 살펴보겠습니다

 

서두에서도 언급을 했지만 단식을 통해 자선을 베푼다고 해도 보여주기식 단식이 돼서는 안 될 것입니다. 선물과 포장지를 예를 들었지만 포장지는 상품이나 선물을 포장하기 위해 잠시만 쓰여질 뿐이지 어느 누가 포장지를 잘 보관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포장지는 그냥 휴지통으로 들어갈 뿐입니다. 하느님을 믿으며 신앙생활을 해도 실제 이 포장지 같은 겉모습에 더 치중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이런 게 언급이 돼서 다른 하나만 더 언급하고자 합니다. 재미 있는 비유가 될 것 같습니다. 실제 이야기로 듣기도 했고 또 보기도 했고 들어서 어떤 판단을 한 것도 아니고 실제 느껴서 판단을 한 것입니다. 어떤 자매님이 어떤 자매님을 향해 하시는 말씀이 그 자매님은 성당을 다니는 게 마치 패션쇼하러 성당을 다니는 것 같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저도 이 말을 듣기 전에도 저 역시도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이 말은 오죽했으면 성당을 다니는 게 패션쇼라는 말을 해서 표현을 할 정도 같으면 그분의 평소 신앙의 모습이 어떠했는지는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아실 것입니다. 이 표현에서 우리는 사실 더 정확한 사실을 하나 알아야 할 게 있습니다. 가령 그분이 고가의 옷을 입었다고 해서 그런 식으로 말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이건 이런 말을 함의하고 있습니다. 옷의 가치만큼 만약에 자신의 행동이나 다른 모든 면에서도 그와 동등한 수준의 품격이 있는 행동 같은 걸 했다면 설령 그렇게 표현한 분이 스스로 패션쇼라고 표현하며 그분을 약간 부정적으로 평가를 하고 싶다고 해도 실제로는 그렇게 표현하지 못할 것입니다. 아마 힘들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그건 고가의 옷만큼 신앙의 모습도 그와 동급의 소유자였다면 그렇게 하기 힘들다는 것입니다. 이건 무엇을 의미할까요? 사실 이런 의미도 있습니다. 비록 고가의 옷은 아니지만 또한 절대적인 것도 아니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마치 그 사람의 얼굴에서 풍겨지는 어떤 독실하고 경건한 신앙인의 모습과 또 평소에 하는 행동의 모습에서도 그런 모습이 나타난다면 비록 옷이 고가는 아니더라도 그분이 입고 있는 그 옷의 가치는 그와 같은 분이 입었을 땐 그 가치가 달리 보일 것입니다. 저는 이런 사실을 카르투시오 수도원에서 수도원 체험을 할 때 뼈저리게 느낀 사실입니다. 헝겊으로 기워 누더기가 된 수도복을 보며 그 수도복은 화려한 고급진 수도복과 비교하면 이미 비교할 수 없는 수도복이라고 저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초대 수도원장님이신 장폴 수도원장님의 수도복을 볼 때마다 묵상한 게 있습니다. 그분의 한평생 수도생활의 성적표는 그 수도복만 봐도 알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이건 영상으로 실제 봐도 실제 본 느낌과는 전혀 다를 것입니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 어떤 누가 봐도 저와 같은 생각을 하게 될 것입니다. 설사 이 세상 모든 사람이 모른다고 해도 하느님만은 아실 것입니다. 저 같은 부족한 인간도 아는데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그렇게 청빈한 삶으로 하느님을 섬겼기 때문에 여든이 넘은 연세에도 그 눈빛이 아이 같은 눈빛을 가지고 계신다는 것도 저는 경이롭다고 표현을 하고 싶습니다. 그렇습니다. 누더기 같은 수도복을 입고 있어도 영혼이 아주 맑기 때문에 그 수도복은 이 세상 그 어떤 수도복과도 비교가 되지 않을 수도복인 것처럼 겉도 사실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내면이 그만큼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이게 오늘 바로 복음에서 말하는 진정한 의미의 단식 중 하나가 될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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