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송영진 신부님_<얼마나 큰 사랑을 받고 있는지부터 깨달아야 합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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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최원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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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25-03-15 | 조회수66 | 추천수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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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네 원수는 미워해야 한다.’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 사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그것은 세리들도 하지 않느냐? 그리고 너희가 자기 형제들에게만 인사한다면, 너희가 남보다 잘하는 것이 무엇이겠느냐? 그런 것은 다른 민족 사람들도 하지 않느냐? 그러므로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 5,43-48).”
1)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라는 계명을 들을 때마다, ‘원수와도 같은 그 사람’부터 떠올리고, 그 사람을 ‘사랑해야 하는’ 일만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 경우에, 원수를 사랑하라는 계명은 너무나도 지키기 어렵다는 고정관념에 빠지게 됩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내가’ 주님의 사랑을, 또 수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음을’ 왜 생각하지 않을까? “나는 사랑받은 적이 없다.” 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은 제대로 사랑하지 못합니다. <아예 사랑하기를 거부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정말로 사랑받은 적 없는 사람이 있을 수 있을까? 사람이 하나도 없는 외딴섬 같은 곳에서 혼자 살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런 곳에서도 주님의 사랑은 늘 있습니다.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든지 간에 그 사랑을 믿고, 깨닫고, 고백할 때, 그때 비로소 사랑 실천이 시작됩니다.
2) “나는 한 번도 누군가에게 원수가 된 적이 없다.” 라고 생각하거나 주장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원수에 대한 사랑 실천’을 ‘하는 일’로만 생각하고, ‘받는 일’로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누구든지 죄를 지으면, 물론 정도의 차이가 있긴 하지만, 그 순간부터 주님에게도, 또 이웃에게도 원수가 되어버린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누군가에게 원수가 된 적이 없다는 말은, 죄를 지은 적이 없다는 말이기도 하고, 그것은 대단히 교만한 말입니다.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이 바로 위선자입니다. 정말로 한 번도 죄를 지은 적이 없다면, 회개할 필요가 없는 것이고, 그러면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마태 4,17) 라는 예수님의 복음 선포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이 되고, 즉 예수님의 구원이 필요 없는 사람이 되고, 그 사람은 예수님(하느님) 나라에 못 들어갑니다. “원수를 사랑하여라.” 라는 계명을 실천하는 일은, 원수 같은 나를 변함없이 사랑하시는 주님의 사랑과 이웃들의 사랑을 깨닫고, 고백함으로써 시작할 수 있습니다. 사랑받고 있음을 깨닫지 못하고, 인정하지 못한다면, 원수를 사랑하라는 계명은 실천하기가 너무나도 힘들고 어려운 계명으로만 남아 있게 될 것입니다.
3)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 라는 말씀에서, “인간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기억해 주십니까? 사람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돌보아 주십니까?(시편 8,5)” 라는 시편이 연상됩니다. 우리는 이 시편을 “제가 무엇이기에 이토록 저를 기억해 주시고 돌보아 주십니까?”로 바꿔서 생각해야 합니다. 한낱 죄인일 뿐인 나를, 아무것도 아닌 존재인 나를, 하느님께서 극진히 사랑하신다는 믿음은 신앙의 출발점이고, 신앙생활을 할 수 있게 해 주고, 원수 같은 사람도 사랑할 수 있게 해 주는 힘입니다. 하느님은 살인자 카인도 보호해 주신 분입니다(창세 4,15). 우리는, ‘보잘것없는 나’를 주님께서, 또 이웃들이 변함없이 사랑해 주고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되찾은 아들의 비유’를 보면, 작은아들이 집으로 돌아왔을 때 아버지는 그를 꾸짖지 않고 잔치를 벌입니다(루카 15.24). 말하자면 ‘밥부터 먹인’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사랑입니다. <우선 먼저 아들을 사랑으로 품어 준 것입니다.> 자기가 얼마나 사랑받고 있는지를 깨닫는다면 그때부터 진짜 회개를 시작하게 되고, 사랑 실천을 하게 됩니다. 반면에, 큰아들은 자기가 아버지의 사랑 안에서 살고 있음을 모르고 있었거나 부정하고 있었기 때문에, 동생이 돌아온 것을 기뻐하지 않고 화만 내고 있습니다(루카 15,28-30). 사랑받고 있음을 모르거나 부정하면, 용서를 실천하지도 않고, 사랑을 실천하지도 않는다는 것을 큰아들의 모습에서 잘 볼 수 있습니다.
4)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너희는 하느님의 사랑처럼 완전한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입니다. ‘원수 같은 사람’도 사랑하는 것은, 완전한 사랑을 실천하는 방법 가운데 하나입니다.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하고, 자기 형제들에게만 인사하는 것은 ‘불완전한 사랑’이고, 그것은 사실상 사랑이 아닙니다. “무슨 상을 받겠느냐?” 라는 말씀과 “너희가 남보다 잘하는 것이 무엇이겠느냐?” 라는 말씀은, “하느님으로부터 사랑으로 인정받지 못한다.” 라는 뜻이고, “그것은 세리들도 하지 않느냐?” 라는 말씀과 “그런 것은 다른 민족 사람들도 하지 않느냐?” 라는 말씀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하는 것은 죄인들이나 하는 짓이다.”, 즉 “죄를 짓는 일이다.” 라는 뜻입니다.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 죄라는 것입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 [출처] 사순 제1주간 토요일 강론|작성자 송영진 모세 신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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