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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사순 제2주일 다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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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박영희 쪽지 캡슐 작성일2025-03-16 조회수123 추천수4 반대(0) 신고

[사순 제2주일 다해] 루카 9,28ㄴ-36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약속의 증표’라고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결혼반지’입니다. 결혼반지를 부부가 나누어 낀다는 것은 혼인서약 때 발설했던 사랑의 약속, 즉 상대방을 자신의 배우자로 맞아들여 즐거울 때나 괴로울 때나, 성할 때나 아플 때나, 일생 신의를 지키며 사랑하고 존경하겠다는 약속을 반드시 지키겠다는 다짐을 드러내는 것이지요. 상대방이 한 그 다짐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남편과 아내 상호간에 혼인 계약이 맺어집니다. 그리고 누군가와 혼인 계약을 맺게 되면 그 계약을 맺은 상대방에 대한 책임과 의무를 다해야 합니다. 사랑으로 일치된 부부 공동체로 살면 여러가지 유익과 혜택들을 누리게 되니, 그에 따르는 책임과 의무를 성실히 이행해야 함은 당연한 일인 겁니다. 만약 부득이한 사유가 없는데도 그 책임과 의무를 다하지 않는다면, 그래서 상대편 배우자에게 상처를 입히고 손해를 끼친다면 그건 혼인 때 했던 중대한 약속을 깨는 잘못이기에 사회적으로 큰 지탄을 받게 됩니다.

 

오늘의 전례 독서에서도 그와 비슷한 약속을 맺는 모습이 보입니다. 먼저 제1독서인 창세기는 하느님께서 당신 피조물인 아브람과 계약을 맺으시는 장면입니다. 아브람은 “네 고향과 친족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너에게 보여 줄 땅으로 가거라.”(창세 12,1)라는 하느님의 말씀에 즉시 순명하여, 평생 터전을 잡고 살아온 우르 땅을 기꺼이 떠났지요. 그것이 하느님의 뜻이었고, “나는 너를 큰 민족이 되게 하고, 너에게 복을 내리며, 너의 이름을 떨치게 하겠다. 그리하여 너는 복이 될 것이다.”(창세 12,2)라는 하느님의 약속을 굳게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에 하느님은 당신 말씀을 전적으로 믿고 즉시 실행에 옮긴 그의 믿음을 ‘의로움’으로 인정해 주셨습니다. 그런 그의 모습이야말로 당신 백성들이 마땅히 본받아야 할 올바른 태도라 보신 겁니다. 또한 아브람에게 했던 약속을 ‘계약’으로 발전시키십니다. 계약(契約)이란 ‘서로의 관계가 묶여지는 약속’을 의미하는데, 고대 근동지방에서 계약은 동물을 이용한 희생제사가 동반되는 일종의 ‘예식’으로 진행되었습니다. 정해진 제물을 반으로 잘라 서로 마주보게 둔 후 그 사이를 계약 당사자들이 지나가며 계약의 세부 내용을 선언했는데, 이는 계약을 어길 시 두 동강난 제물처럼 파멸에 이르더라도 기꺼이 감수하겠다는 굳은 맹세를 드러내는 것이었지요. 그런데 하느님께서 아브람과 맺으신 계약에서 특이한 점은 아브람은 제물 사이를 지나가지 않고, 오직 하느님만이 “연기 뿜는 화덕과 타오르는 횃불”의 모습으로 제물 사이를 지나가시며 ‘이집트 강에서 유프라테스 강까지 이르는 큰 땅을 주겠다’고 선언하셨다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 부족하고 약한 인간에게 그 어떤 저주나 손해를 끼치지 않고 무상으로 당신 사랑과 은총을 주고자 하시는 하느님의 자비가 드러나는 겁니다.

 

한편,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놀라운 표징을 통해 당신께서 하신 약속이 반드시 실현되리라는 것을 확실하게 보증해 주십니다. 그 일이 일어나는 장소는 ‘타볼산’입니다. 성경에서 산은 하느님께서 현존하시는 거룩한 장소, 인간이 하느님 가까이로 나아가 그분과 친교를 맺는 특별한 장소를 가리키지요. 예수님께서 핵심 제자 세 명을 데리고 타볼산에 오르시는 것은 그들에게 하느님의 현존과 영광을 직접 느끼는 강렬한 신앙체험을 시켜주시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그 체험이 그저 놀라운 사건이나 일회성 이벤트로 여겨지는 건 원치 않으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기도 중에 당신을 간절히 찾는 이들과 함께 하신다는 것을, 부족하고 약한 우리는 하느님과 함께 함으로써 거룩하고 완전한 존재로 변화된다는 것을 깨닫게 해 주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산에 오르시는 내내 하느님께 기도하십니다. 그러자 ‘그분의 얼굴 모습이 달라지고 의복이 하얗게 번쩍였다’고 오늘 복음은 기록하고 있지요. 기도를 통해 하느님과 친교를 나누고 그분과 깊은 일치를 이룬 사람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 하느님을 닮은 거룩한 모습으로 변화됩니다. 40일 동안 시나이 산에서 하느님을 만나고 온 모세가 그랬지요. 그의 얼굴이 밝게 빛나는 것을 보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느님의 현존을 느꼈던 것처럼, 예수님도 당신 제자들이 기도 중에 거룩하게 변화된 당신 얼굴을 보고 하느님의 현존을 느끼기를 바라셨던 겁니다. 한편 옷이 하얗게 빛났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인간의 능력을 뛰어넘는 신적 권능을 지니고 계시며 그 권능과 은총으로 당신을 믿고 따르는 이들을 깨끗하고 거룩한 존재로 변화시켜 주신다는 것을 드러냅니다. 예수님은 이 두가지 표징을 통해 당신께서 하느님의 일을 한다는 이유로 많은 고난을 겪고, 세상의 권력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겠지만, 사흘만에 반드시 되살아 나리라고 하셨던 그 예언적 약속(루카 9,22)이 반드시 실현되리라는 걸 제자들에게 알려주고자 하신 겁니다.

 

그 예언적 약속은 외아드님의 희생과 죽음을 통해 당신 백성을 구원하시려는 하느님의 뜻에 맞닿아 있습니다. 즉 예수님께서 부활의 영광을 누리시려면 반드시 수난 당하시고 죽으셔야만 하는 겁니다. 거룩하게 변모하신 예수님 곁에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난 것은 그런 점을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하느님 나라에서 영광을 누리는 거룩한 모습으로 나타난 그들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이루실 일, 곧 하느님 아버지의 뜻에 따라 온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실 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눕니다. 율법을 상징하는 모세와 하느님의 구원 약속을 상징하는 엘리야가 예수님과 만났다는 건, 예수님께서 경직되고 문자화된 율법의 부족함을 당신 사랑으로 채우시고, 하느님의 구원 약속을 당신 죽음으로 완성하시리라는 것을 드러내는 일종의 예언에 해당합니다. 우리를 구원과 참된 행복으로 이끄시려는 하느님의 뜻은 예수님의 사랑과 희생으로 비로소 완성된다는 겁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구원의 그 심오한 진리를 깨닫지 못합니다. 좋은 것을 보았으니 그 자리에 머물고 싶었던 겁니다. “주님께 청하는 것이 하나 있어 나 그것을 얻고자 하니 내 한평생 주님의 집에 살며 주님의 아름다움을 우러러보고 그분 궁전을 눈여겨보는 것이라네”(시편27,4). 라고 노래했던 시편 저자의 마음이 바로 베드로의 마음입니다. ‘산 아래’의 세상에서는 하루 종일 예수님께 몰려드는 군중들에게 시달리느라 매일매일이 피곤하고 힘들었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예수님은 자꾸만 당신이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할 거라는 절망적인 말씀을 하셔서 여러가지로 걱정되고 불안했던 게 사실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거룩하게 변모하신 예수님의 모습을 통해 그분께서 주님이심을 자기 두 눈으로 확인했으니, 그런 그분 곁에 유다인들이 존경하고 사랑하는 모세와 엘리야 예언자까지 함께 있으니, 베드로에게는 그 영광된 자리가 본인이 그토록 갈망하던 ‘하느님 나라’였지요. 그래서 예수님께 계속 그 산 위에 머무르자고 청합니다. 그럴 수만 있다면 자기들이 지금 당장 세 분이 머무르실 초막을 지어드리겠다는 허황된 약속을 하면서 말이지요. 그러나 주님께서 하느님 나라에 머무르실 거처는 때가 되면 재가 되어 사라질 세속의 것들로 만드는 게 아닙니다. 주님의 말씀을 귀 기울여 듣고 들은 대로 실행하는 우리의 삶을 통해 단단하게 지어지는 겁니다. 그러니 하느님 나라에 참된 거처를 마련하여 주님과 함께 영원한 행복을 누리고 싶다면 쉽고 편한 것을 찾는 나태함과 안일함을 내려놓고 이 말씀대로 살아야 합니다.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 함 승수 신부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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