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이수철 프란치스코신부님--자비하신 하느님 아버지 “하닮의 여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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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선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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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25-03-22 | 조회수35 | 추천수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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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3.22.사순 제2주간 토요일
미카7,14-15.18-20 루카15,1-3.11ㄴ-32
자비하신 하느님 아버지 “하닮의 여정”
“주님은 어지시다 찬양들 하라. 당신의 자비는 영원하시다.”(시편136,1)
새벽 성무일도 독서기도시 시편 136장 26절까지 매 구절마다 반복된 후렴이 '당신의 자비는 영원하시다' 였습니다. 자비하신 주님을 찬미함으로 시작된 하루입니다. 오늘은 그 유명한 복음중의 복음, 순복음이라는 되찾은 아들의 비유입니다. 되찾은 아들의 비유이자 자비하신 아버지의 비유입니다. 우리가 믿고 희망하고 사랑하는 하느님이 어떤 분인지 환히 보여주는 복음입니다. 말그대로 하느님은 대자대비하신 아버지입니다. 자비는 하느님의 마음이자 하느님의 얼굴입니다. 바로 우리 삶은 이런 자비하신 하느님을 닮아가는 하닮의 여정, 자비의 여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자비롭고 너그러우시네.”
오늘 화답송 후렴도 자비하신 주님을 노래합니다. 미카 예언자도 이런 자비하신 하느님을 고백합니다.
“우리의 허물을 용서해 주시고, 죄를 못 본 체해 주시는, 당신 같으신 하느님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분은 분노를 영원히 품지 않으시고, 오히려 기꺼이 자애를 베푸시는 분이시다. 그분께서는 우리를 가엾이 여기시고, 우리의 허물들을 모르는 체 해 주시리라.”
자비하신 주님을 고백한후, 저희의 모든 죄악을 바다 깊은 곳으로 던져 주십사, 또 저희를 성실히 대하시고 자애를 베풀어 달라 우리를 대신하여 기도하는 미카 예언자입니다. 기도와 더불어 하느님의 자비를 배워야 하는 우리들입니다. 자비하신 하느님 아버지를 평생 배워가며 자비한 사람이 되는 것이 우리의 평생숙제입니다. 오늘 옛 현자의 말씀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유익한 공부는 덕을 쌓아가는 것이다. 덕이 있는 사람 곁에는 반드시 사람들이 모인다.”<다산> “큰 덕을 지닌 사람은 반드시 지위를 얻고, 녹을 받고, 명성을 얻고, 장수를 누린다. 큰 덕을 지닌 사람은 반드시 천명을 받는다.”<중용>
바로 자비하신 하느님 아버지를 닮아가는 하닮의 여정에 충실한 이들에게 더해가는 참 좋고 큰 덕이 바로 애덕愛德입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은 어떤 분이신지요? 바로 오늘 복음이 우리가 평생 배워야 할 자비하신 하느님 아버지의 모습을 잘 보여줍니다. 읽을 때 마다 새로운 감동을 선사하는 복음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어떤 분이신지, 또 우리는 누구인지 거울처럼 비춰주는 복음입니다. 마치 하느님 자비의 거울같은 복음입니다. 부단히 우리의 회개를 촉구하는 복음입니다.
자기 몫을 챙겨 아버지의 집을 떠났던 작은 아들을 회개로 이끈 것은 바로 자비로웠던 아버지의 추억이었습니다. 아버지를 떠난 자기 중심의 삶이 참 자유가 아닌 방종이었음이 확연히 드러나는 상황입니다. 아버지를 떠나 극한의 곤궁한 처지에 있던 작은 아들은 비로소 제정신이 들고 아버지를 생각하며 회개합니다.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렇게 말씀드려야지.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저를 아버지의 품팔이꾼 가운데 하나로 삼아 주십시오.”
철저한 회개를 통해 제정신을 찾은 작은 아들은 아버지의 집으로 귀향합니다. 은총의 사순시기, 부단한 회개를 통해 자비하신 아버지의 집으로 귀향하는 홈컴잉(home-coming)의 시간입니다. 오매불망 날마다 길목에 서서 작은 아들의 귀향을 기다리던 아버지는 돌아오는 아들을 보자 가엾은 마음이 들어 달려가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춥니다.
바로 이 장면을 포착한, 제 집무실에 걸려 있는 렘브란트의 그림입니다. 가엾이 여기는 이 마음이 바로 하느님의 마음입니다. 우리 하느님은 바로 이런 자비하신 아버지입니다. 작은 아들의 회개의 고백을 듣는둥 마는둥 아버지는 당신 종들에게 명령하십니다.
“어서 가장 좋은 옷을 가져다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발을 신겨 주어라. 그리고 살찐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아라. 먹고 즐기자. 나의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도로 찾았다.”
바로 이 마음이, 이 사랑이 자비하신 하느님의 마음이요 사랑입니다. 이리하여 즐거운 잔치를 벌이기 시작했으니 바로 회개한 우리들을 위한 미사잔치를 닮았습니다. 거지같은 삶에서 회개를 통해 자녀로서의 고귀한 품위를 회복한 작은 아들같은 우리들입니다. 세리와 죄인들을 상징하는 작은 아들이요 우리들이라면, 평생 아버지의 집에서 아버지를 충실히 섬겨온 큰 아들은 당대의 의롭다 자부하는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물론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아우의 귀향을 반기기는커녕 격한 반응을 보이는 큰 아들은 그대로 우리의 모습입니다.
“보십시오. 저는 여러해 동안 종처럼 아버지를 섬기며 아버지의 명을 한 번도 어기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저에게 아버지는 친구들과 즐기라고 염소 한 마리 주신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창녀들과 어울려 아버지의 가산을 들어먹은 저 아들이 오니까, 살진 송아지를 잡아 주시는군요.”
여지없이 폭로되는 큰 아들의 내면의 본색입니다. 아버지의 집에서 자녀답게 산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마음을 전혀 헤아리지 못하고 종처럼 살았던 큰 아들입니다. 아우를 저 아들이라 부르며 적대적인 그 언행이 참으로 목불불견, 무자비합니다. 아버지와 가장 가까이 살았으면서도 마음은 멀리 떠나 있었음을 봅니다.
제대로 ‘자녀답게’가 아닌 그냥 ‘종처럼’ 생각없이 아버지를 섬겼던 것입니다. 사람의 속은 정말 알 수 없습니다. 바로 이것이 모범 신자의 정체일 수 있습니다. 큰 아들을 달래는, 회개를 바라시며 호소하시는 아버지의 반응입니다. 두 아들 사이에서 전전긍긍하는 아버지의 모습에서 두 아들에 대한 한결같은 사랑을 배웁니다.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너의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 그러니 즐기고 기뻐해야 한다.”
바로 큰 아들같은 우리를 향한 말씀입니다. 바로 이것이 자비하신 하느님 아버지의 마음이요, 이 아버지를 그대로 닮은 또 하나의 아들, 바로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바로 큰 아들같은 우리를 향한 말씀입니다. 과연 나는 큰 아들, 작은 아들, 예수님 중 누구를 닮았는지요?
우리 모두 자비하신 아버지의 마음, 예수님의 마음을 지니고 거룩한 미사잔치에 참여하도록 합시다. 날마다 주님의 거룩한 미사은총이 자비하신 하느님 아버지를 닮아가는 하닮의 여정중에 있는 우리에게 좋은 도움이 됩니다.
“하늘의 하느님을 찬양들 하라. 당신의 자비는 영원하시다.”(시편136,26). 아멘.
성 베네딕도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신부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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