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사순 제2주간 토요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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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박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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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25-03-22 | 조회수49 | 추천수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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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 제2주간 토요일] 루카 15,1-3.11ㄴ-32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너의 저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 그러니 즐기고 기뻐해야 한다.“
부모님은 자녀들을 믿고 사랑하는 마음을 어떻게 표현하실까요? 바로 ‘기다림’을 통해서입니다. 여러가지로 부족해도, 수많은 실수와 잘못들로 당신을 걱정시키고 마음을 아프게 해드려도, 결국은 올바른 길을 찾아갈 거라는 믿음으로, 언젠가는 당신 마음을 알아주리라는 기대와 바람으로 묵묵히 바라보시며 기다려주시는 겁니다. 오늘 복음 속 비유에 등장하는 아버지도 아들들을 그렇게 믿고 기다려 주십니다.
먼저 작은 아들에 대한 기다림입니다. 아버지와 함께 사는게 답답하고 불편하여 집을 나가고 싶다고 해도 서운해하지 않으십니다. 나중에 돌아가시면 저에게 주실 유산 조금 일찍 준다 생각하시라는 철 없고 무례한 모습에도 화내지 않으십니다. 이런거 하면 안되고 저런거 조심해야 한다는 충고도 하지 않으십니다. 이제야 자기 맘대로 살 수 있다며 신이 나서 떠나가는 아들의 뒷모습을 지켜보시며, 그가 잘 지내기를 바라고 또 바라십니다. 그 작은 아들이 결국 재산을 탕진하고 거지꼴로 산다는 소식을 들은 뒤로는 그가 죄송스런 마음에 밖에서 방황하지 않기를, 어서 당신 품으로 돌아오기를 애타게 기다리십니다. 그리고 마침내 작은 아들이 저 멀리 보이자 버선발로 마중나가 따뜻하게 안아주시고, 받아 주십니다.
다음으로는 큰 아들에 대한 기다림입니다. 큰 아들은 동생처럼 아버지랑 같이 못살겠다며 집을 뛰쳐나가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몸만 아버지 곁에 있었을 뿐 마음까지 함께 하지는 못했지요. 아버지 곁에서 큰 은총과 복을 누리고 있었음에도 그것이 얼마나 감사하고 기쁜 것인지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아버지 때문에 자기가 하고 싶은 건 참고 하기 싫은 건 억지로 해야한다고 여겨 괴로워했습니다. 자신이 아버지를 위해 그런 희생과 노력을 하니 당연히 그에 합당한 보상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자기 바람대로 되지 않자 오랜 시간 동안 마음 속으로 아버지를 원망했습니다. 그런데 제 멋대로 살다 돌아온 동생을 탓하고 혼내시기는 커녕 그를 위해 잔치까지 베풀어주시는 아버지의 모습에 서운하고 화가 나서 결국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어 버리지요. ‘난 한 순간도 당신 아들로 산 적 없다’고, 당신과 함께 살아온 시간들이 나에겐 지옥 같았다고... 그러나 청천벽력 같은 그 소리에도 아버지는 그를 탓하거나 혼내지 않으십니다. 그저 언제나 한결같이 그를 향해 있었고 지금 이 순간에도 마찬가지인 당신 사랑을 표현하실 뿐입니다.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오늘 비유는 우리를 향한 하느님 아버지의 한 없는 사랑과 자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그런 하느님을 향한 참된 신앙이 무엇인지에 대한 가르침이기도 하지요. 참된 신앙은 구원에 대한 보증 때문에 억지로, 심판과 징벌에 대한 두려움으로 어쩔 수 없이 하느님 곁에 머무르는 게 아닙니다. 내가 무슨 잘못을 해도 이해해주시고 용서해주시는, 나 스스로 잘못을 바로잡고 올바른 길로 들어서도록 참고 기다려주시는 하느님을 굳게 믿으며 그분과 함께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 하느님께서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것을, 그분을 굳게 믿고 그분께 나 자신을 의탁하면 하느님의 것이 곧 나의 것임을 마음에 깊이 새기고 그분과 함께 하는 일상을 잔치처럼 기쁘게 사는 것입니다.
* 함 승수 신부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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