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사순 제3주일 다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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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박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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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25-03-23 | 조회수65 | 추천수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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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 제3주일 다해] 루카 13,1-9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처럼 멸망할 것이다.“
우리가 살면서 하는 욕들 중에 가장 심하고 무서운 욕은 무엇일까요? 동물에 빗대어 하는 욕도 있고, 부모까지 싸잡아서 비난하는 욕도 있으며, 성적/폭력적으로 수위가 높은 험한 말들을 사용하는 욕까지 정말 다양한 것들이 있지만, 그 중 가장 심하고 무서운 욕은 아마도 “저런 천벌을 받을 놈!”이 아닐까 합니다. 다른 욕들은 기껏해야 인간적인 차원에서 험담하고 위협하는 정도지만, ‘천벌 받아 죽을 놈’은 인간이 자기 힘과 능력으로 벌할 수 없는 사람에게 하느님께서 대신 무서운 징벌을 내려주시기를 청하는 것이니, 그리고 그 처벌은 이 세상의 차원에서 끝나지 않고 죽음 이후까지 계속해서 영향을 미치니 무서운 겁니다. 그렇기에 아무에게나 그런 욕을 하지는 않습니다. 인간의 탈을 쓰고 있지만 하는 행동이 너무나 사악하고 수많은 이들에게 큰 피해와 상처를 입히는, 그러면서도 자기 잘못을 인정하거나 뉘우치기는 커녕 오히려 피해자들에게 탓을 돌리고 자기 행동을 합리화하는, 누가 봐도 정말 ‘나쁜 놈’에게 하느님께서 꼭 벌을 내려주시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그런 욕을 하는 겁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행실대로 갚아주신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살다보면 ‘상선벌악’이라는 하느님의 정의가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게 맞는지 의심스러워지는 상황들을 종종 마주하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그런 경우를 볼 수 있지요. 하느님께 제물을 바치려고 했던, 누가봐도 의롭고 올바른 일을 하던 갈릴래아 사람들이 이스라엘을 점령하고 핍박하는 빌라도 총독에 의해 학살당하는 일이 벌어진 겁니다. 그 소식을 접한 유다인들은 당혹스러움을 금치 못했습니다. 정말 하느님께서 계신다면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나도록 내버려 두시는지 납득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렇다고 하느님의 존재를 부정할 수는 없으니 자기들 나름대로 그렇게 된 이유를 찾아보았는데 그것이 바로 ‘인과응보’(因果應報)였습니다. 그 갈릴래아 사람들이 죽임을 당한 것은 그 전에 하느님 뜻을 거스르는 죄를 저질렀기 때문이고, 그 죄가 원인이 되어 죽음이라는 벌을 받게 되었는데 어쩌다보니 그 시간이 제물을 바치는 때와 겹쳤을 뿐이라는 해석이었지요. 나름대로는 합리적 추론이라고 생각했을 지 모르나 그런 식의 해석은 피해자들을 물리적으로 한 번, 그리고 신앙적으로 또 한 번 죽이는 잔인한 처사였습니다. 불의의 사고로 갑작스럽게 죽음을 당한 것도 억울하고 괴로운데 죄인취급까지 받아야했으니까요.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의 왜곡된 ‘하느님상’과 ‘심판관’을 바로잡고자 하십니다. 빌라도에게 학살당한 갈릴래아 사람들이나, 실로암 탑 붕괴사건으로 목숨을 잃은 사람들이 다른 이들보다 특별히 큰 잘못을 저질러서 그런 슬픈 일을 당한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또한 하느님은 그런 식으로 우리를 단죄하시고 처벌하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러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멸망할 것이다.” 이 말씀을 통해 예수님은 남들을 향하던 비판과 단죄의 시선을 자기 자신을 향한 성찰의 시선으로 바꾸십니다. 또한 ‘너희도 멸망할 수 있다’는 경고의 메시지를 통해 그들이 각자의 잘못을 뉘우치고 회개하도록 촉구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알려주신 하느님 아버지는 선하고 자비로운 분이십니다. 그렇기에 누군가가 죄를 지었다고 해서 즉시 재난이나 불행으로 그를 징벌하지 않으시지요. 오히려 인내로 기다려주시고 자비로 품어주시며 사랑으로 감싸 안아주심으로써 죄인이 잘못된 길에서 벗어나 당신께 돌아오도록 이끄십니다. 그러니 그분 자녀인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고통과 슬픔을 겪는 이들에게 ‘죄인’이라는 낙인을 찍는게 아니라, 그들이 그 고통과 슬픔을 이겨낼 수 있도록 함께 해주고 도와주는 것입니다.
모든 불행, 사고, 재난이 하느님에게서 온다고 생각하면 사람은 그것을 해결할 수도, 해결하기 위해 노력할 필요도 없어집니다. 이웃이 슬픔과 고통을 겪는 것을 보며 ‘내가 아니라서 다행’이라고 가슴을 쓸어내리면 그 뿐입니다. 그들이 그런 일을 겪는 건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어서라고 그들을 몰아부침으로써 그들이 겪는 고통과 슬픔을 나에게서 최대한 멀리 떨어뜨려 놓으면 그만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한다고 해서 나에게는 그런 일이 닥치지 않으리라고 장담할 수 있을까요? 나도 언젠가는 그들과 같은 처지가 될 지 모른다는 불안과 걱정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요?(넷플릭스 드라마 <지옥>)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어설픈 심판과 단죄일랑 그만두고 자기 성찰과 회개에 집중하라고 하십니다. 그러면서 드시는 예가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의 비유”입니다. 이 비유에서 포도밭 주인은 세상을 창조하시고 섭리하시는 하느님을, 포도 재배인은 그 세상에서 사는 우리에게서 열매를 수확하시어 아버지께 건네시는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는 말로는 ‘주님 주님’ 하면서 정작 삶으로는 주님을 따르지 못하는 우리, 지금은 시간적으로 물질적으로 여유가 없다며 주님을 따르는 일을 자꾸만 나중으로 미루는 우리, 그래서 주님으로부터 충만한 은총과 사랑을 받아 누리면서도 그에 합당한 열매는 맺지 못한 채 전전긍긍하는 우리를 가리키지요. 그런데 참 이상합니다. 왜 애써서 일군 귀한 포도밭에, 길가에도 흔하게 널린 무화과나무를 심으셨을까요? 그건 우리가 ‘자격’으로 따지면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을 누리기에 한없이 부족한 존재임을, 그럼에도 하느님께서는 그런 우리에게 큰 자비를 베푸셨음을 의미합니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우리가 열매 맺을 때까지 ‘삼 년’을, 즉 충분한 시간과 기회를 주시며 기다려주셨지요. 그럼에도불구하고 열매를 맺지 못한 것은 전적으로 우리 탓이니, 복음 속 비유에서처럼 하느님께서 당장 우리를 잘라내어 포도밭 밖으로 내던져 버리신다고 해도 억울해하거나 불만을 가질 수는 없을 겁니다. 그저 그분의 처분대로 따를 수 밖에요.
그런데 황송하게도 우리 구세주께서 그런 우리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주자고 하십니다. 그것도 우리가 알아서 잘 하도록 팔짱끼고 가만히 기다리시기만 하는 게 아니라, 우리 둘레를 파서 거름을 주겠다고 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거름이란 우리를 위해 기꺼이 내어주신 그분의 몸과 피입니다. 우리가 성체성사를 통해 당신의 몸과 피를 받아모심으로써 당신 뜻을 따를 힘을 얻기를 바라시는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내어주신 또 다른 거름은 우리에게 알려주신 하느님 말씀과 계명입니다. 그 거름을 통해 우리가 잘못된 길에서 벗어나 하느님을 향하도록 지혜와 용기를 주시는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내어주신 마지막 거름은 성령입니다. 아버지의 거룩한 영을 우리에게 보내주시어 우리 각자가 성령의 이끄심에 따라 구원의 길을 충실히 걸음으로써 하느님 나라까지 무사히 다다르게 하시려는 겁니다. 그러니 참된 회개를 통해 그리고 사랑과 자비의 실천을 통해 우리가 하느님 아버지께 받은 은총이 풍성한 열매를 맺게 해야겠습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구원받을 또 한 번의 기회를 열어주신 주님 사랑을 헛되지 않게 하는 길입니다.
* 함 승수 신부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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