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사순 제3주간 월요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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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박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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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25-03-24 | 조회수51 | 추천수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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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 제3주간 월요일] 루카 4,24ㄴ-30 “예수님께서는 그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가셨다.“
‘자초지종(自初至終)’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의 과정’이라는 뜻입니다. 한국말은 자초지종을 찬찬히 살피며 끝까지 들어봐야 그 뜻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지요. 영어는 주어 다음에 바로 동사가 나오기 때문에 초반부만 들어도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 대충 알아들을 수 있지만 한국말은 동사가 맨 나중에 나오기 때문 끝까지 들어야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를 제대로 헤아릴 수 있는 겁니다. 오늘 제1독서에 나오는 ‘나아만’은 처음에 자초지종을 제대로 헤아리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조국인 시리아에 요르단 강보다 더 크고 맑은 강이 많다는 이유로 엘리사의 말을 따르려고 하지 않은 것이지요. 그러나 치유의 은총을 받기 위해 중요한 것은 강물의 깊이나 수질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에 순명하는 마음이었습니다. 나아만은 부하들로부터 자초지종을 듣고 자신의 편견과 고집을 내려놓았습니다. 그리고 엘리사의 말대로 요르단 강에 몸을 일곱번 담그자 그의 나병이 씻은 듯 나았습니다. 엘리사 예언자가 알려준 ‘치유의 길’로 나아간 결과 하느님의 놀라운 은총을 체험하게 된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고향인 나자렛 고을 사람들은 끝까지 자초지종을 들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보다 자신들의 섣부른 판단을 믿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일으키시는 기적과 표징을 보기보다 그분의 배경과 조건을 먼저 보았습니다. 색안경을 쓰면 세상이 그 안경의 색에 물들어 보이듯, 고정관념과 편견, 고집과 질투의 안경을 쓴 나자렛 고을 사람들에게는 예수님이 같잖아 보였고 고깝게 보였지요. 그래서 예수님이 하느님 나라로 가는 구원의 길을 알려주셨음에도 그 길로 나아가지 않았습니다. 세상에서 부와 명예를 얻어 성공하는 길, 쉽고 편한 길만을 찾으며 엉뚱한 길, 잘못된 길을 고집했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예수님은 사렙타의 과부 이야기와 시리아 장수 나아만의 이야기를 언급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큰 고통과 시련을 겪고 있던 암울한 시기에 그 이방인 두 명만 하느님의 은총을 입은 것은 유다인들이 스스로가 하느님께 선택받은 민족이라는 우월감과 특권의식에 사로잡혀 정작 구원받기 위한 노력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음을, 하느님의 은총은 특별한 자격을 갖춘 사람이 당연한 듯 누리는 게 아니라, 그분의 은총을 얻기를 간절히 바라며 노력하는 이에게 선물처럼 주어지는 것임을 상기시키신 겁니다.
그런데 나자렛 고을 사람들에게는 그런 예수님 말씀이 불쾌하고 듣기 불편했습니다. 그로 인해 큰 분노에 사로잡혀서는 예수님을 벼랑 끝에서 떠밀어 죽이려고 듭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지나가십니다. 사람들의 오해와 배척, 핍박에도 절대 주눅들지 않고 당당하게 당신의 길을 가신 겁니다. 그분은 오늘도 내일도 그 다음 날도 계속해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한 십자가의 길을 가셔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로부터 중요한 소명을 받고 파견되신 그분은 예루살렘에서 그 소명을 완성하시기 전까지 결코 죽으실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끝까지 당당하게 당신께 주어진 길을 걸으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우리도 따라야 합니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속담은 주님 앞에서는 절대 통하지 않습니다. 주님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지금 걷는 이 길이 곧 우리가 다다르고 영원히 살아가야 할 목적지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를 구원과 참된 행복으로 이끄시는 주님 말씀을 헛되게 만들지 않도록 순명으로 그 말씀을 받아들이고 실천으로 따라야겠습니다. 그래야 그 말씀이 우리에게 참된 ‘복음’이 됩니다.
* 함 승수 신부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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