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사순 제4주간 수요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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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조재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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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25-04-01 | 조회수86 | 추천수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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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 예언자는 바빌론 유배 시대에 활동하며 하느님의 사랑과 구원을 예고했습니다. “여인이 제 젖먹이를 잊을 수 있느냐?"라는 표현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모성애적 사랑으로 묘사합니다. 인간 사회에서 어머니의 사랑은 조건 없고 희생적이며, 자기 존재를 잊을 정도로 아이를 위해 헌신합니다. 하지만 이사야는 설령 인간의 어머니가 자식을 잊을지라도, 하느님은 결코 우리를 잊지 않으신다고 선언합니다.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하느님의 사랑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사랑에서 드러납니다. 우리가 이걸 단순히 교리적으로만 받아들이면 좀 어렵고 멀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문학 작품을 통해 이 사랑을 더 쉽게, 그리고 깊이 이해해 보려고 합니다. 빅토르 위고의 『레 미제라블』이 있습니다. 이야기의 주인공, 장 발장은 감옥에서 19년을 살고 나왔습니다. 어디를 가든 죄인 취급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미리엘 주교가 그를 받아주었습니다. 그런데 장 발장은 은식기를 훔쳐 달아납니다. 우리가 주교님이라면 어떻게 했을까요? "경찰 불러! 저 도둑놈 잡아!" 이랬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미리엘 주교는 오히려 경찰에게 말합니다. "이 사람은 도둑이 아닙니다. 내가 이 은식기를 주었습니다.” 죄인까지도 품어주는 사랑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입니다.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이 있습니다. 여기에 아주 중요한 인물이 나옵니다. 바로 알료사라는 수도승입니다. 알료사는 형과 동생 사이에서 갈등을 겪으면서도 끝까지 사랑과 용서를 선택합니다. 그의 스승, 조시마 수도사는 이런 말을 합니다. "인간은 사랑을 통해 구원받는다. 하지만 사랑은 고통과 함께한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희생하고, 그 사람의 아픔을 함께 짊어지는 것. 바로 이것이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입니다. 안데르센의 『성냥팔이 소녀』가 있습니다. 추운 겨울밤, 성냥팔이 소녀는 거리에 혼자 남겨졌습니다. 아무도 그녀를 기억해 주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 성냥불을 켜면서 소녀는 할머니의 따뜻한 품을 떠올립니다. 그리고 결국 하늘나라로 가게 됩니다. 이 장면에서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볼 수 있습니다. 세상은 예수님을 버렸지만, 하느님은 결코 예수님을 잊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부활을 통해 그 사랑이 완성됩니다. 마더 테레사 성녀의 이야기입니다. 수녀님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는 큰일을 할 수 없습니다. 다만 작은 일을 큰 사랑으로 할 수 있을 뿐입니다." 십자가 사랑이 거창한 게 아닙니다. 가족에게 먼저 다가가서 말 한마디 따뜻하게 건네는 것, 용서하기 힘든 사람을 마음으로 품어 보는 것, 외로운 사람에게 관심을 주는 것, 이런 작은 실천이 바로 십자가 사랑의 시작입니다. 교회가 당면한 문제들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은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으로 산다.’라고 하셨지만, 교회에는 물질과 자본의 바벨탑이 쌓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문턱이 높아서 들어오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현실에 안주하려는 마음이 앞서서 ‘열정’이 식어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교회에 필요한 것은 재물이 아닙니다. 바오로 사도와 같은 열정이 필요합니다. 김대건 안드레아 성인과 같은 열정이 필요합니다.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과 같은 열정이 필요합니다. 그런 열정이 잠들어 있는 신앙을 깨울 수 있습니다. 그런 열정이 굳게 닫힌 마음을 열 수 있습니다. 지금 교회에 필요한 것은 계명과 율법이 아닙니다. 하혈하던 여인이 가졌던 갈망입니다. 시로페니키아 여인이 가졌던 갈망입니다. 예수님께 자비를 청했던 소경의 갈망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런 갈망을 귀하게 여기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유다인들은 갈망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진리를 보여주는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려는 욕심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현실에 안주하려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구원이라는 산에 오르려는 갈망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열정과 갈망으로 한 시대를 치열하게 살았던 고 신영복 선생님의 ‘처음처럼’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처음으로 하늘을 만나는 어린 새처럼/ 처음으로 땅을 밟고 일어서는 새싹처럼/ 우리는 하루가 저무는 저녁 무렵에도/ 아침처럼 새봄처럼/ 처음처럼 다시 새날을 시작하고 있다./ 산다는 것은 수많은 처음을 만들어가는 끊임없는 시작이다.” 열정과 갈망이 있다면 십자가를 지고 갈 수 있습니다. 열정과 갈망이 있다면 영원한 생명을 만날 수 있습니다. “여인이 제 젖먹이를 잊을 수 있느냐? 제 몸에서 난 아기를 가엾이 여기지 않을 수 있느냐? 설령 여인들은 잊는다 하더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않는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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