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송영진 신부님_<몸의 건강만 생각하지 말고 구원을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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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최원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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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25-04-01 | 조회수25 | 추천수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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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에는 서른여덟 해나 앓는 사람도 있었다. 예수님께서 그가 누워 있는 것을 보시고 또 이미 오래 그렇게 지낸다는 것을 아시고는, ‘건강해지고 싶으냐?’ 하고 그에게 물으셨다. 그 병자가 예수님께 대답하였다. ‘선생님, 물이 출렁거릴 때에 저를 못 속에 넣어 줄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가는 동안에 다른 이가 저보다 먼저 내려갑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일어나 네 들것을 들고 걸어가거라.’ 그러자 그 사람은 곧 건강하게 되어 자기 들것을 들고 걸어갔다. 그날은 안식일이었다. 그래서 유다인들이 병이 나은 그 사람에게, ‘오늘은 안식일이오. 들것을 들고 다니는 것은 합당하지 않소.’ 하고 말하였다. 그가 ‘나를 건강하게 해 주신 그분께서 나에게, ′네 들것을 들고 걸어가라.‵ 하셨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그들이 물었다. ‘당신에게 ′그것을 들고 걸어가라.‵ 한 사람이 누구요?’ 그러나 병이 나은 이는 그분이 누구이신지 알지 못하였다. 그곳에 군중이 몰려 있어 예수님께서 몰래 자리를 뜨셨기 때문이다. 그 뒤에 예수님께서 그 사람을 성전에서 만나시자 그에게 이르셨다. ‘자, 너는 건강하게 되었다. 더 나쁜 일이 너에게 일어나지 않도록 다시는 죄를 짓지 마라.’ 그 사람은 물러가서 자기를 건강하게 만들어 주신 분은 예수님이시라고 유다인들에게 알렸다. 그리하여 유다인들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그러한 일을 하셨다고 하여, 그분을 박해하기 시작하였다(요한 5,5-16).”
1) 이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어떤 병자를 고쳐 주셨다는 단순한 ‘치유 이야기’가 아니라,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박해하기 시작했다는 ‘박해 이야기’입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처음으로 유대인들의 박해가 언급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을 기준으로 해서 생각하면,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성전 정화’ 때에는 예수님의 ‘권한’만 문제 삼았을 뿐이고, 예수님을 박해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본격적으로 미워하고 박해하기 시작한 것은 ‘안식일 규정’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에게는, 안식일을 지키는 일은 이스라엘 민족의 정체성에 관한 일이기도 했고, 유대교라는 종교의 핵심 가치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안식일을, 글자 그대로 ‘목숨을 걸고’ 지켰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눈에는 예수님께서 안식일을 지키지 않거나 무시하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의 종교 질서와 사회 질서를 근본적으로 뒤흔드는 것으로 판단했고, 그래서 예수님을 제거하려고(죽이려고) 했습니다.
2) 10절을 보면, 유대인들은 “왜 그러느냐?” 라고 묻지 않고, 처음부터 “너는 지금 율법을 어기고 있다.” 라고 단정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 병자가 오랜 세월 동안 병을 앓고 있었다는 것도, 그에게 기적이 일어났다는 것도, 그가 완전히 건강을 되찾게 되었다는 것도, 유대인들에게는 중요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12절의 “당신에게 ‘그것을 들고 걸어가라.’ 한 사람이 누구요?” 라는 유대인들의 말은, 전후 사정에 대해서는 아무 관심이 없고, 오직 안식일 규정에 어긋나는 행동에만 관심을 갖고 있었음을 나타냅니다. 그런 태도가 바로 ‘율법주의’입니다. <무슨 이유가 있더라도, 무슨 부득이한 사정이 있더라도, 그런 것은 전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고 ‘무조건’ 율법을 지켜야만 한다는 태도가 바로 율법주의입니다. 인정도 사랑도 없고, 무자비한 율법만 남아 있는 모습입니다. 그렇게 ‘율법’에 ‘사랑’이 없으면, 그 율법은 인간을 억압하는 폭력이 될 뿐입니다.>
3) 이야기에 나오는 병자는 예수님을 몰랐고, 몰랐으니까 안 믿었고, 안 믿었으니까 치유의 은총을 청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그의 병을 고쳐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의 가엾고 딱한 사정만 보시고 아무 조건 없이 은혜를 베풀어 주신 것, 바로 그것이 예수님의 ‘자비’입니다. <그 일에서, “믿음이란, 은총을 얻기 위한 조건이 아니라, 받은 은총에 대한 응답”이라는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그 병자의 입장에서는, 갑자기 찾아온 ‘뜻밖의 행운’처럼 ‘치유의 은총’을 얻었기 때문에, 크게 기뻐하고 고마워하는 것이 당연한 일인데, 이야기를 보면, 그 병자가 기뻐했다는 말도 없고, 고마워했다는 말도 없고, 하느님을 찬양했다는 말도 없습니다. 그는 기뻐하고 감사드리기는커녕 유대인들에게 가서 예수님을 밀고합니다. 그의 ‘배은망덕’은 ‘치유의 은총’을 얻은 것에 대한 기쁨보다 안식일을 어겼다는 이유로 처벌을 받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더 크게 느끼고, 그것을 더 심각하게 생각하는 모습입니다. 그것은 그 병자 자신도 ‘율법주의’ 라는 멍에와 족쇄에 단단히 사로잡혀 있었음을 나타냅니다.
4) “자, 너는 건강하게 되었다. 더 나쁜 일이 너에게 일어나지 않도록 다시는 죄를 짓지 마라.” 라는 말씀에서 ‘더 나쁜 일’은 ‘구원받지 못하는 일’입니다. 이 말씀은, 몸의 건강에만 만족하지 말고, 영혼의 구원을 향해서 나아가라는 뜻입니다. 유대교 기준으로는, 예수님을 안 믿고, 율법을 잘 지키는 일은 죄를 짓는 것이 아니라 잘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 기준으로는 죄를 짓는 일입니다. 메시아 예수님을 거부하는 일이고, 또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을 받기를 거부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율법에 따른 행위와 상관없이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고 우리는 확신합니다(로마 4,28).”>
송영진 모세 신부 ------------------------------------- [출처] 사순 제4주간 화요일 강론|작성자 송영진 모세 신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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