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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생활묵상 : 냉담의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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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강만연 쪽지 캡슐 작성일2025-04-01 조회수55 추천수3 반대(0) 신고

 

며칠 전에 세 가지 묵상글을 올리겠다고 약속한 글 마지막입니다. 며칠 전에 굿뉴스를 폰에서 잠시 로그인해 들어왔는데 눈에 하나 들어온 게 있었습니다. 자유게시판에 "냉담의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였던 걸로 기억합니다. 호기심에 클릭해 들어가보니 글이 내려져 있었습니다. 올렸는데 내용이 부적절해 내렸는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쉬운 주제는 아닙니다. 저는 이 주제에 대해 근 10년 전부터 생각해봤습니다. 왜 이런 주제를 생각해봤는가 하면 제가 개종한 거에 대해 후회를 했기 때문입니다. 그 모든 문제를 나열할 수는 없습니다. 개신교도 문제가 있습니다. 개신교보다 천주교가 좋은 점도 있고 개신교가 더 좋은 점도 있습니다. 그럼 샘샘이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가고 싶은 이유가 있었습니다. 

 

만약에 개신교도 똑같이 성모님을 공경하는 교리가 있다면 미련없이 다시 돌아갔을 겁니다. 결국 남은 이유는 성모님을 저버릴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성모님을 배제하고 그럼 개신교로 돌아가고 싶다면 가장 큰 이유를 댄다면 그곳도 사람이 사는 동네이기 때문에 시기, 질투 같은 게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상처도 받을 수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이건 종교를 떠나 인간 사회에서는 당연한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금의 차이가 있다면 정도의 차이가 있습니다. 이 정도의 차이가 영혼을 힘들 게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조금 더 자세히 설명해드리겠습니다. 같은 시기 질투라도 양상이 다릅니다. 최소한 그런 감정을 가지게 되는 건 사실인데 그 감정을 통해 질투의 대상이 되는 사람을 힘들게는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시기 같은 건 하나의 모습입니다. 제가 시기, 질투를 받는다는 게 아닙니다. 어떤 현상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제가 대한민국 모든 개신교를 다 다닌 건 아니지만 두 종교를 경험한 바에 의하면 각각 특유하고 공통된 특성을 가지고 있는 건 사실입니다. 천주교만 예를 들어도 제가 우리나라 두 개 교구를 제외하고 근 13년 동안 피정이나 아니면 인맥을 통해 다른 교구와 교류를 해보면 정말이지 놀라울 정도로 생각하는 가치관이라든지 이런 게 너무나도 똑같다는 사실입니다. 이건 저는 미스테리라고 생각할 정도로 의아합니다. 왜 그런지를 많은 세월 동안 고민했는데 어느 날 그 이유를 백프로는 아니지만 알게 됐습니다. 그 이유는 생략함을 양해바랍니다. 제가 판단했을 땐 이 원인은 세상 종말 때까지 변화가 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이제 이런 배경을 바탕으로 해서 냉담의 책임 소재에 대해 한번 생각해보겠습니다. 이건 케이스 바이 케이스이기 때문에 재판해서 어떤 판결을 구할 수 있는 것처럼 단적으로 말하긴 힘들 것입니다. 저는 평신도의 입장에서 보면 물론 교회에서는 어떻게 볼 수 있을진 모르지만 일단 크게 세 영역으로 나누어서 보면 크게 교회, 자기 자신의 신앙과 믿음, 본당 공동체 이렇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세 군 데가 다 책임이 있습니다. 여기까지는 공평합니다. 이젠 여기서 저울질을 해서 책임 소재를 가감해보겠습니다. 일단 교회인 성당부터 따져보겠습니다. 

 

저는 교회의 책임이 냉담 교우에 대해 큰 비중을 차지한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교회라는 건 폭넓은 의미로만 해석하겠습니다. 사목적 입장에서 보면 냉담 교우가 있다면 개신교처럼은 아니더라도 심각성을 인식하지 않고 오면 좋고 안 와도 별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한 영혼을 영혼으로 보는 게 아니라 그냥 하나의 인간 그 자체 사람으로 보는 것입니다. 사람으로 보는 것과 한 영혼으로 보는 것과는 차이가 확실히 다릅니다. 이런 부분에 대해서는 솔직히 개신교와 비교하면 거의 낙제 점수에 가깝습니다. 좋게 말하면 그 사람의 판단을 존중해 주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다른 시각으로 보면 방치하는 수준입니다. 

 

개신교와 비교해보면 개신교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어려움이 있다면 신앙공동체나 사목자와의 상담 같은 걸로 해결하는 방법이 있어서 다시 힘을 내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데 모든 분이 다 그런 건 아니지만 대체적으로 보면 가톨릭은 이런 난관이 있어서 고민을 토로할 창구 역할을 할 수 있는 것도 부족합니다. 설령 있다고 해도 그런 걸 골치아픈 문제로 생각해 그냥 적당히 굳이 그런 문제를 고민하려고 하는 사목적 지침이 현저히 떨어진다는 것입니다. 8년 전에 개신교로 개종한 사람이 쓴 글을 본 적이 있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말씀드리기가 어렵지만 그 자매님이 남기신 글 중에 인상적인 내용 하나만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인간 집단 내 일어나는 공통점 말고 그건 종교 불문하고 일어나는 거라 여기선 배제하겠습니다. 최소한 물론 그곳도 안 맞는 사람도 있긴 하지만 신자와 신자 사이에 일어나는 문제 외에는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된다는 것 그 자체만으로도 마음이 한결 가볍다는 것입니다. 이외에도 다른 요인도 있지만 이런 면을 놓고 보면 교회가 이런 부분에서는 신자가 냉담을 한다면 책임이 자유롭지 못한 게 사실입니다. 여기서 제가 교회라는 건 사목자 포함 교회 공동체의 장을 맡고 있는 사람을 포괄적으로 포함한다고 보시면 될 듯합니다. 이제는 그럼 신자는 책임이 없는가 하면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만약 혹여 교회가 일정 부분 책임이 있다고 해도 아니 그렇지는 아니 하겠지만 설령 전적으로 책임이 있다손치더라도 물론 고통스럽고 힘들겠지만 그것 또한 자신에게 주어진 자신의 십자가라고 생각하고 어떻게 해서든지 이론적으로는 기도하며 인내해야 한다는 건 알지만 인간인지라 쉽지는 않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속에 남 모르른 아픔이 있다면 또는 억울함이 있다면 이 세상에서는 그 억울함과 아픔을 해결할 수는 없어도 나중에 언젠가 하느님 대전에서는 그 억울함과 아픔을 잘 견뎌내서 하느님으로부터 위로를 받고야 말겠다는 굳은 의지로 신앙의 끈을 붙잡으려고 해야 할 것입니다. 하느님 앞에서도 양심의 꺼리김이 없다면 마지막날엔 그런 아픔을 준 사람은 분명 하느님의 준엄한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때 하느님의 위로를 생각하며 견뎌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느님의 준엄한 심판이라고 해서 무서운 징벌 같은 게 내려지길 바라는 건 아닙니다. 단, 한 말씀만으로도 위로가 될 게 있습니다. "왜 그때 그렇게 그 사람에게 모질게 대했니?" 하는 질책의 말씀 한 마디면 그 사람은 그제서야 깊은 통회를 하게 될 것입니다. 

 

이제 정리를 하겠습니다. 어떤 이유든지 냉담의 원인은 정확하게 말하면 하느님 앞에선 통하지 않을 것입니다. 힘들어서 하느님을 등지느냐 선택을 하느냐는 오로지 자기 마음에 달려 있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요? 설령 교회에 책임이 있다고 해도 모든 사람이 다 냉담하는 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 난관과 시련 속에서도 잡초처럼 질기게 견뎌내는 영혼도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럴 수만 있다면 하느님께서 그 영혼을 언젠가 보게 되신다면 어떻게 보실 것 같습니까? 바로 정금 같은 영혼으로 보실 것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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