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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생활묵상 : 모든 사람을 사랑할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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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강만연 쪽지 캡슐 작성일2025-04-03 조회수32 추천수0 반대(0) 신고

 

 

신앙상담 코너에 올라온 제목을 보고 묵상한 내용입니다. 청년의 고민입니다. "모든 사람을 사랑하며 살아가는 방법이 있을까?" 하는 방법의 고민입니다. 먼저 이 질문에 고민을 하기에 앞서 성경은 우리에게 어떻게 하라고 가르칠까요? 답은 무엇일까요? 원수도 사랑하라고 했으니 모든 사람을 사랑하라는 가르침을 주신다고 생각하실 겁니다. 정답은 아닙니다.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원수도 사랑하라고 하신 그 뜻에는 우리가 알고 있는 뜻과 다릅니다. 이건 지금 제가 할 수 없고요 연말쯤에 한번 그에 대한 설명을 공유하겠습니다. 내용이 상당히 방대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는 서로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이 원리를 다른 복음과 매치해서 보겠습니다. 우리가 평화의 인사를 할 때를 가정하겠습니다. "평화를 빕니다." 라고 인사를 했는데 상대방이 만약 그 인사를 의도적으로 받지 않았다고 한다면 그 평화는 자기에게 돌아온다는 것입니다. 그건 제 말씀이 아닙니다.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내용입니다. 이 말씀을 깊이 묵상해보시길 바랍니다. 

 

사랑에도 이 원리가 적용됩니다. 여러분, 사랑이라는 건 이론적으로 보기엔 일방통행으로도 할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런 모습도 보긴 합니다. 사실은 그렇게 보일 뿐입니다. 그게 가능한 분은 오직 하느님 한 분밖에는 없습니다. 인간 육신의 옷을 입고 있는 한 인간으로서는 절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나마 그 중간 정도 간 분이 있다면 성인이 있을 겁니다. 여러분, 성인은 어디까지나 성인입니다. 성인이라고 해서 인간 본성을 완전히 탈피한 게 아닙니다. 우리는 착각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성인이라고 하면 거의 하느님께 근접한 수준의 위인으로 생각하는데 아닙니다. 성인이라고 하는 건 하느님까지는 아니지만 보통의 인간 수준을 월등히 능가한 사람을 편의상 성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다만 수준이 차이가 난다뿐이지 성인 역시도 어느 일정 부분은 인간적인 본성도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의인과 성인을 달리 표현했을 뿐이지 거의 동일한 의미로 봐야 할 것입니다. 

 

마태오복음 최후의 심판 25장에 나오는 의인과 같은 의미일 것입니다. 다시 정리를 조금 해서 논리를 전개하겠습니다. 일방적이고 맹목적인 사랑을 할 수 있는 분은 온전히 신성만으로 가득찬 하느님 외에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성인도 하느님처럼 완전하지 않기 때문에 성인 역시도 불가능한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이제 다시 원래의 질문으로 돌아가 질문을 해보겠습니다. 인간은 모든 사람을 사랑할 수 있나요? 어떤 대답이 나올 수 있을까요? 일단 '모든'이라는 이 조건을 충족시킬 수 없습니다. 그럼 만약 이런 질문이라면 어떨까요? "전부는 아니지만 그래도 많은 사람은 사랑할 수 있을까요?"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모든이라는 전제가 없기 때문에 '많은 사람은 사랑할 수 있다'고 하는 답을 하는 건 가능할 겁니다. 그럼 여기서 배제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바로 싫은 사람입니다. 

 

싫은 사람이라고 하면 이것도 크게 두 가지의 경우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자기의 마음에 들지 않아 싫은 사람이 있을 수 있고요 또 하나는 상대방이 자신에게 자신이 싫어하는 행동 같은 걸 해서 싫어할 수 있습니다. 물론 복음에서는 이렇게 또 가르칩니다. "누구나 하는 것처럼 하는 것으로는 이방인도 그렇게 하기 때문에 어떻게 빛의 자녀라고 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에는 직접 드러나 있지 않지만 그 속에 숨은 다른 뜻도 있다는 걸 알아야 됩니다. 그 수준은 누구나가 할 수 있기 때문에...... 하느님의 자녀라면 적어도 그 수준은 넘어서야 최소한의 하느님의 자녀로서의 체면은 유지할 수 있지 않겠느냐 하는 뉘앙스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말을 좀 달리 표현하면 이렇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마치 "신자라면 적어도 하느님을 믿지 않는 세상 사람보다는 좀 더 나아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것과 일맥상통한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 말에 대해 이해를 잘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가 부족한 죄인이기 때문에 하느님을 믿는 것이지 완전하면 하느님을 왜 믿겠는가?" 하는 식으로 말을 합니다. 이 말도 맞지만 세상 사람보다는 하느님을 믿는 사람이 그래도 좀 더 나야야 한다는 말과는 상황이 다릅니다. 또 잠시 정리를 하겠습니다. 사랑은 일방적으로 할 수 없습니다. 심지어 부모 자식 사이에도 이게 가능할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인간인 부모 역시도 자기 자식이라도 자기에게 잘 하는 자식과 애만 먹이는 자식 둘 다 비교하면 잘 하는 자식에게 더 마음이 가게 되는 것입니다. 부모와 자식도 그런데 영적으로는 같은 하느님의 자녀라고는 하지만 육적으로는 남이기 때문에 이런 남을 자기 몸처럼 사랑할 수 있다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것입니다. 그럼 불가능에 가까운 걸 왜 하느님께서는 그렇게 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을까요? 

 

세상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목표치라고 하는 한계가 있는 것과 없는 것은 확연한 차이가 납니다. 목표가 있으면 최소한, 목표는 달성하지는 못해도 그 목표에 근접은 할 수 있도록 동기부여가 될 수 있기 때문에 목표가 없는 것보다는 더 좋은 결과를 낼 확률은 높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그런 한계점을 물론 불가능에 가까운 지점에 설정을 하시긴 했지만 사람도 그렇지 않습니까?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고 생각하는 일에도 초인적인 노력으로 극복한 사람이 있는 것처럼 우리도 그럴 수 있기에 그런 실현 불가능할 것 같은 한계를 설정하셨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누군가는 그런 말을 합니다. 기록은 깨기 위해 있다고 말입니다. 

 

이제 최종 정리하겠습니다. 예수님은 원수까지도 모두 사랑하라고 하셨지만 그건 불가능, 가능의 문제가 아닙니다. 한계를 설정해 그 한계를 넘어서면 좋겠다는 희망 사항입니다. 우리는 다만 그 한계점이 아주 머나먼 곳에 있지만 그 지점을 향해 끊임없이 걸어가야만 한다는 생각은 가져야 합니다. 그곳에 도달하느냐 마느냐 그 결과는 미루어 두어야 하겠습니다. 그렇게 가다 보면 마지막 인간의 노력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그 지점까지 걸어가게 된다면 그 지점에서는 하느님께서 도와주실 겁니다. 하느님께서도 아실 겁니다. 하느님이 창조하셨는데 우리 피조물에게는 하느님과 같은 사랑을 할 수 없는 존재라는 생각을 모르실 리야 있겠습니까? 그럼 이제 결론이 정리가 될 것입니다. 

 

모든 사람을 사랑하라고 하신다면 그 의미가 무엇일지 말입니다. 제가 밖에서 폰 카톡 창에서 작성해 이걸 굿뉴스로 전송하려고 하다 보니 컴에서 작성할 때랑은 조금 내용을 체크할 수가 없긴 하지만 전체적인 내용은 이해가 되실 겁니다. 감사합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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