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송영진 신부님_<나는 과연,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의 ‘착한 양’인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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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최원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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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25-05-12 | 조회수82 | 추천수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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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양 우리에 들어갈 때에 문으로 들어가지 않고 다른 데로 넘어 들어가는 자는 도둑이며 강도다. 그러나 문으로 들어가는 이는 양들의 목자다. 문지기는 목자에게 문을 열어 주고, 양들은 그의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그리고 목자는 자기 양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 밖으로 데리고 나간다. 이렇게 자기 양들을 모두 밖으로 이끌어 낸 다음, 그는 앞장서 가고 양들은 그를 따른다. 양들이 그의 목소리를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낯선 사람은 따르지 않고 오히려 피해 달아난다. 낯선 사람들의 목소리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요한 10,1-5).”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양들의 문이다. 나보다 먼저 온 자들은 모두 도둑이며 강도다. 그래서 양들은 그들의 말을 듣지 않았다. 나는 문이다. 누구든지 나를 통하여 들어오면 구원을 받고, 또 드나들며 풀밭을 찾아 얻을 것이다. 도둑은 다만 훔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고 올 뿐이다. 그러나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얻어 넘치게 하려고 왔다(요한 10,7-10).”
1)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고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착한 목자’이신 분”이라고 믿는 것은, 우리 교회의 기본 신앙인데, 우리는, “나는 착한 목자만 따르는 착한 양인가?”도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착한 목자’로 믿으면서도 ‘착한 양’으로 살고 있지 않다면, 그 ‘믿음’은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2) “양들은 그의 목소리를 알아듣는다.”는, “양들은 그의 목소리를 알아들어야 한다.”이고, “그를 따른다.”는, “그를 따라야 한다.”입니다. “낯선 사람은 따르지 않고 오히려 피해 달아난다.” 라는 말씀은, “낯선 사람은 따르지 말고, 그를 피해서 멀리 달아나라.”이고, “낯선 사람들의 목소리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는, “낯선 사람들의 말을 듣지 마라.”입니다.
3) 목자가 아닌 ‘도둑’과 ‘강도’에 관한 말씀은, 바오로 사도의 다음 말에 연결됩니다. “하와가 뱀의 간계에 속아 넘어간 것처럼, 여러분도 생각이 미혹되어 그리스도를 향한 성실하고 순수한 마음을 저버리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사실 어떤 사람이 와서 우리가 선포한 예수님과 다른 예수님을 선포하는데도, 여러분이 받은 적이 없는 다른 영을 받게 하는데도, 여러분이 받아들인 적이 없는 다른 복음을 받아들이게 하는데도, 여러분이 잘도 참아 주니 말입니다(2코린 11,3-4).” “그러한 자들은 그리스도의 사도로 위장한 거짓 사도이며 사람을 속이려고 일하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놀랄 일이 아닙니다. 사탄도 빛의 천사로 위장합니다. 그러니 사탄의 일꾼들이 의로움의 일꾼처럼 위장한다 하여도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그들의 종말은 그들의 행실대로 이루어질 것입니다(2코린 11,13-15).” 또 베드로 사도의 다음 말에도 연결됩니다.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에 거짓 예언자들이 일어났던 것처럼, 여러분 가운데에도 거짓 교사들이 나타날 것입니다. 그들은 파멸을 가져오는 이단을 끌어들이고, 심지어 자기들을 속량해 주신 주님을 부인하면서 파멸을 재촉하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그들의 방탕한 행실을 본받아, 그들 때문에 진리의 길이 모욕을 받을 것입니다. 그들은 또 탐욕에 빠져, 지어낸 말로 여러분을 속여 착취할 것입니다(2베드 2,1-3ㄱ).” 거짓 사도들, 거짓 예언자들, 거짓 교사들은 교회 밖에도 있고, 교회 안에도 있습니다. <초대 교회 때부터 지금까지 계속 그렇습니다.> 사실, 안에 있는 자들이 더 위험합니다. 속는 줄도 모르고 속아 넘어가기 때문입니다. 그자들에게 속지 않으려면, 교회의 가르침을 잘 들어야 하고, 끊임없이 기도하면서 항상 ‘말씀 안에서’ 살아가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4) “나는 양들의 문이다.” 라는 말씀은, 예수님만이 유일한 ‘구원의 문’이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14장에 있는 다음 말씀에 연결됩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요한 14,6).”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증언합니다. “그분 말고는 다른 누구에게도 구원이 없습니다. 사실 사람들에게 주어진 이름 가운데에서 우리가 구원받는 데에 필요한 이름은 하늘 아래 이 이름밖에 없습니다(사도 4,12).” 또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증언합니다. “하늘에도 땅에도 이른바 신들이 있다 하지만 ― 과연 신도 많고 주님도 많습니다만 ― 우리에게는 하느님 아버지 한 분이 계실 뿐입니다. 모든 것이 그분에게서 나왔고 우리는 그분을 향하여 나아갑니다. 또 주님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 계실 뿐입니다. 모든 것이 그분으로 말미암아 있고 우리도 그분으로 말미암아 존재합니다(1코린 8,5-6).” <호기심 때문인지, 유식한 척 하려고 그런 것인지, 다른 종교들과 철학이나 심리학 서적들을 뒤적거리다가, 예수님의 ‘말씀’에서 점점 멀어지고, 결국 신앙이 흔들리거나 잘못된 길로 빠지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그런 일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입니다.>
5) 제1독서에 있는 이야기는,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과 다른 종교 사람들의 구원’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들의 구원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 지시하신 대로(마르 16,15), 사도들이 이스라엘을 벗어나서 온 세상 모든 피조물에게 본격적으로 복음을 선포하기 시작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 [출처] 부활 제4주간 월요일 강론|작성자 송영진 모세 신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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