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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부활 제5주일 다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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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박영희 쪽지 캡슐 작성일11:12 조회수22 추천수2 반대(0) 신고

[부활 제5주일 다해] 요한 13,31-33ㄱ.34-35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여러분은 ‘좋아하는 것’과 ‘사랑하는 것’의 차이를 아십니까? 우리가 누군가를 좋아하는 것은 보통 그가 가진 ‘장점’ 때문입니다. 얼굴이 잘 생겨서, 가진 게 많아서, 유머감각이 뛰어나서, 내 말을 잘 들어줘서 등등… 그런데 그 사람과 함께 하는 시간이 길어지다보면 내 마음이 이끌렸던 장점들은 어느 새 익숙해져 당연한 것이 됩니다. 또한 관계가 친밀해진만큼 가까이에서 바라보면 멀리 있을 때에는 눈에 띄지 않던 그의 단점들이 더 크게 보이지요. 그러면 자연스레 그를 좋아했던 감정이 사그러들고 관계도 소원해집니다. 반면에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은 그가 지닌 단점마저도 끌어안는 것입니다. 가진 것이 없지만, 배움이 부족하지만, 성격이 무뚝뚝해 재미가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그런 부족함마저 있는 그대로 내 안에 받아들여 함께 하고 싶은 마음이 바로 사랑인 겁니다. 그리고 바로 이 사랑이 우리로하여금 고난과 역경을 견디게 하고, 슬픔과 절망에서 일어나게 하며, 삶의 참된 기쁨과 행복을 누리게 하지요.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다른 이들로부터, 그리고 하느님으로부터 참으로 사랑받는 존재가 될 수 있을까요? 오늘 복음 속에 그 답이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하신 다음의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 잘못을 바로잡을 기회를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유다 이스카리옷은 그분을 적대자들의 손에 팔아 넘기려는 자기 계획을 실행하기 위해 밖으로 나갔습니다. 그로 인해 예수님이 적대자들의 손에 붙잡혀 수난당하시고 돌아가시리라는 예고는 이제 바뀔 수 없는 명백한 ‘현실’이 되었지요. 그런데 그런 절망적이고 암울한 상황에서 예수님은 갑자기 ‘영광’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유다의 배반으로 인해, 당신이 걸으셔야 할 ‘십자가의 길’로 인해 당신이 영광스럽게 되셨고, 당신의 순명과 희생을 통하여 하느님 아버지께서도 영광스럽게 되셨다는 겁니다. ‘영광’이라는 말은 “빛나고 아름다운 영예”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보통 모두가 우러러볼만한 사회적 성공, 세속적으로 큰 결실을 맺은 뛰어난 업적을 이뤄낸 이들이 ‘영광’을 누린다고 생각하지요. 그런데 모두가 꺼려하며 피하고 싶어하는 ‘고통의 길’을 걷게 되실 분이 당신 자신이 영광스럽게 되었다고 하시니, 그 말씀이 대체 무슨 뜻인지 이해하기가 참으로 어렵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신 것은 이 세상의 영광을 추구하지 않으시고 오직 아버지 하느님께서 주시는 영광만을 추구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께서 영광스럽게 되셨다’는 말씀은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 그리고 삶과 죽음을 통해 하느님이 얼마나 자비롭고 사랑 넘치시는 분인지가 온 세상에 드러난다는 뜻이 됩니다. 한편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영광스럽게 하신다’는 말씀은 하느님께서 놀라운 기적과 표징들을 통해 당신 아들 예수님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분명히 드러내신다는 뜻이 됩니다. 그 ‘사랑표현’이 예수님께는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큰 영광입니다. 내가 전능하신 하느님으로부터 사랑받는 특별한 존재라는 사실만큼 영광스럽고 기쁜 일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 참된 영광은 세상이 주는 유한하고 부족한 영광과는 비교할 수 조차 없지요.

 

예수님은 우리에게 그 참된 영광을 누릴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십니다. 모든 계명과 율법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이자 근본정신인 ‘사랑’을 함께 살아가는 이웃 형제 자매에게 적극적으로 실천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저것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이 서로가 서로를 진심으로 사랑하라는 계명만 충실히 지키면 하느님으로부터 사랑받는 존재, 그리하여 참된 영광을 누리는 존재가 된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게 그렇게 간단치가 않다는 게 문제입니다. 인간의 사랑은 유한하고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사랑에 대해 연구한 학자들은 사랑의 ‘유효기간’을 길어야 30개월 정도라고 봅니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열정의 불꽃이 아무리 뜨겁게 타올라도 3년을 넘기지 못하고 사그러든다는 것이지요.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3년 마다 이혼하고 다른 배우자를 찾아야 할까요? 아니면 하느님께 사랑받는 존재가 되기를 포기해야 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마음 속에 있는 사랑의 불꽃이 꺼지지 않게 새로운 연료를 꾸준히 넣어주면 됩니다. 30개월 전까지는 사랑의 불꽃이 호르몬과 설렘이라는 연료로 타올랐다면, 그 이후로는 상대방에 대한 연민, 신뢰, 책임이라는 연료로 타오르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이 새로운 연료는 불꽃을 크고 화려하게 키우지 못할 뿐만 아니라, 조금만 부주의하고 방심해도 금새 꺼져 버리기에 유지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이 새로운 연료로 사랑의 불꽃을 잘 유지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각자의 방식으로 사랑을 실천합니다. 그런데 이 ‘각자의 방식’이라는 말이 그 자체로 분명한 ‘한계’를 만들지요. 내가 사랑하고 싶은 사람들만, 내가 선호하는 방법으로, 내가 사랑하고 싶을 때 사랑한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식으로 사랑할 범위와 시간을 한정하는 것은, 상대방의 마음을 고려하지 않고 본인의 입장만 내세우는 것은 참된 사랑이 아니라고 하십니다. 적어도 누군가를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으려면 당신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해야 한다며, 우리가 지향하고 따라야 할 분명한 기준을 알려주십니다. 예수님은 먼저 사랑받아야 사랑하겠다는 ‘조건’을 달지 않으셨습니다. 사랑받은 만큼만 사랑하겠다는 ‘제한’을 두지 않으셨습니다. 소수의 인원을 편애하는 ‘차별’을 하지 않으셨고, 당신 마음을 아프게 하는 이들을 사랑할 사람에서 ‘배제’하지 않으셨습니다. 상대방의 마음을 헤아리셨고, 그의 입장과 상황을 배려하셨으며, 당신이 만나는 모든 이들을 아버지께서 보내주신 특별하고 귀한 존재로 여기셨습니다. 또한 사랑을 함에 있어 후회를 남기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그랬기에 그 사랑이 예수님께는 기쁨과 보람이 되었고, 하느님 아버지께는 영광이 될 수 있었던 것이지요.

 

자녀가 부모로부터 받은 사랑만큼 부모를 사랑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래서 “내리사랑은 있어도 치사랑은 없다”는 속담이 있을 정도이지요. 인간사이의 사랑이 그럴진데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만큼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는 건 당연히 더 어렵지요. 냉정하게 말하면 ‘불가능’하다고 보는 게 맞을 겁니다. 하지만 한 가지 다행인 것은 예수님께서 우리의 그런 부족함과 한계를 너무나 잘 아신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당신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당신을 사랑하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던 그 마음가짐과 방식으로 나와 함께 살아가는 이웃 형제 자매를 사랑하면 된다고 하십니다. 그것이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라는 말씀에 담긴 뜻이지요. 그렇게 사랑하면 우리는 하느님으로부터 사랑받는 자녀가 될 것이고,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이 세상에서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영광입니다. 

 

* 함 승수 신부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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