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은 당신을 사랑하는 이에게 자신을 드러내 보이신답니다.
그래서 나는 예수님이 아버지를 어떻게 사랑하셨는지 눈을 감고 떠올려 보았습니다.
"너희가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다." (요한 14, 24)
예수님은 아버지와 하나였습니다.
이 깊은 일치는 예수님의 말과 행동을 이끄는 원동력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당시의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상황이나 종교 전통에 얽매이지 않으시고,
아버지의 마음과 뜻에 온전히 일치되어
선포해야 할 말씀을 선포하시고,
살려야 할 사람을 살리며, 고쳐야 할 사람을 고치셨습니다.
가난한 이들, 죄인이라 불리는 이들과 함께 식탁을 나누신 그 모든 순간은
아버지께 대한 사랑의 응답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나의 길이시기에
나는 그분을 통해 아버지께 가고자 합니다.
삼위일체의 친교 안에 깊이 머물게 될 때,
나도 움직이게 되겠지요.
세상의 이목이ㅣ나 손익을 따지지 않고
해야 할 말을 하고,
피하고 싶은 일도 감당할 수 있으며,
먹고, 마시고, 입는 것을 절제하고
그 여유를 가난한 이들과 나누며,
나의 시간과 마음을 다른 이들에게 내어 줄 수 있을 것입니다.
나의 욕구를 잠시 내려놓고, 내 뜻을 접을 수 있겠지요.
심지어 그것이 죽음의 길이라 해도,
그 길이 사랑의 길이라면 따를 수 있는 용기가 생길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사랑했던 이들에게 자신을 드러내셨습니다.
마더 데레사에게는 가난한 이들 안에서 ,
소화 데레사에게는 작고 평범한 일상 안에서,
돈 보스코에게는 버려진 아이들 안에서 당신을 드러내셨습니다.
지금 내가
내 곁의 이웃 안에서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다면,
내 입술이 고백하는 '사랑'의 진실성을 되묻게 됩니다.
내가 삼위일체 친교를 정말로 체험하고 있는지도 돌아봐야 겠습니다.
이웃에게서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 채
십자가 앞에서 미소 지으며 사랑을 고백한다면
그 고백은 감상에 젖은 말에 불과할지도 모릅니다.
예수님께 배운 사랑은
감상적인 말이 아니라
가까이 머무는 것
기꺼이 함께 고통받는 것,
함께 살아내는 용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