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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송영진 신부님_<‘사랑’ 없이는 ‘참 평화’도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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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최원석 쪽지 캡슐 작성일2025-05-20 조회수47 추천수2 반대(0) 신고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도, 겁을 내는 일도 없도록 하여라. ‘나는 갔다가

너희에게 돌아온다.’고 한 내 말을 너희는 들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한다면 내가 아버지께 가는 것을 기뻐할 것이다.

아버지께서 나보다 위대하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나는 일이 일어나기 전에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다. 일이

일어날 때에 너희가 믿게 하려는 것이다. 나는 너희와

더 이상 많은 이야기를 나누지 않겠다. 이 세상의

우두머리가 오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나에게 아무

권한도 없다. 그러나 내가 아버지를 사랑한다는 것과

아버지께서 명령하신 대로 내가 한다는 것을

세상이 알아야 한다(요한 14,27.31ㄱ).”

1) ‘평화’가 무슨 물건은 아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무슨 물건을 주듯이 평화를 주시고,

우리가 무슨 물건을 받듯이 예수님에게서

평화를 받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라는 말씀은, “너희가

나의 가르침대로 충실하게 생활하면 ‘참 평화’를

누릴 것이다.”로 해석됩니다.

<예수님께서는 평화 자체를 주시는 것이 아니라,

참 평화를 얻는 방법을 가르쳐 주시고,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실천함으로써

참 평화를 얻어 누리게 됩니다.>

‘예수님의 참 평화’를 얻어 누리는 방법은

‘믿음, 회개, 사랑’입니다.

주님이신 예수님께서 언제나 항상 우리를

보호해 주신다는 ‘믿음’, 그리고 ‘내가’ 능동적으로

실행하는 ‘회개’, 그리고 사심 없이 진실하게 실천하는

‘사랑’을 통해서 참 평화를 얻어 누릴 수 있습니다.

<반대로 말하면, 믿음이 부족하거나 없는 사람은,

작은 위기에도 금방 흔들리고 평화를 잃어버립니다.

또 회개하지 않고 죄 속에서 사는 사람과 사랑 없이

이기적으로 사는 사람에게는 참 평화가 없습니다.>

2) ‘나’와 ‘세상’이라는 말에 초점을 맞춰서,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

라는 말씀을, 예수님의 다음 말씀에 연결해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민족들을 지배하는 임금들은 백성 위에

군림하고, 민족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자들은

자신을 은인이라고 부르게 한다.

그러나 너희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가장 어린 사람처럼

되어야 하고 지도자는 섬기는 사람처럼 되어야 한다.

누가 더 높으냐? 식탁에 앉은 이냐,

아니면 시중들며 섬기는 이냐?

식탁에 앉은 이가 아니냐? 그러나 나는

섬기는 사람으로 너희 가운데에 있다(루카 22,25-27).”

힘으로 군림하고 권세를 부리는 자들은 자기 혼자서만

편안함을 누리면서 그것을 평화라고 착각하는 자들입니다.

그 착각이 바로 ‘세상의 평화’이고, ‘거짓 평화’입니다.

‘나의 편안함’을 위해서 남에게 고통을 주는 것은 죄입니다.

죄를 통해서 얻을 수 있는 평화는 없습니다.

그러면 그자들에게 억압당하는 사람들에게는 평화가 있을까?

인내하면서 영적이고 내적인 평화를 유지할 수는 있지만,

그 억압과 압박이 인내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서면

결국 전쟁 상태로 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낮춤’과 ‘섬김’을 실천하면,

섬기는 쪽과 섬김을 받는 쪽 모두가 평화를 누리게 됩니다.

물론 섬김을 받는 쪽도 함께 섬김을 실천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면서

본을 보여 주신 것처럼 ‘낮춤’과 ‘섬김’은 ‘사랑’입니다.

따라서 “사랑 없이는 평화도 없다.” 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3)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 비유에 나오는 부자는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살면서(루카 16,19), 평화를 누리고 있다고 착각한 자입니다.

<오늘날에도 그런 착각에 빠져 있는 부자들이 많습니다.>

그 부자는 자기 집 대문 앞에 누워 있는(루카 16,20)

가난한 라자로에게 아무 관심이 없었습니다.

혹시 오며 가며 눈에 뜨이는 라자로를 가엾게 여겨서

빵 부스러기를 조금씩 던져 주었을지도 모르는데,

그것을 관심과 사랑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부자가 죽어서 ‘저승에서 고통을’ 받게 되는 상황은,

그가 살면서 누리던 편안함이 평화가 아니었다는 것과

라자로에게 사랑 실천을 하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해 주는 일과 같습니다.

그러면 죽어서 아브라함 품에서 위로를 받게 된 라자로는

이승에서 사는 동안 평화를 누렸을까?

라자로 자신은 “나는 그래도 참 평화를 누렸다.” 라고

말할지도 모르지만, 우리는 라자로가 아니라

부자 쪽을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그 비유를 말씀하신 취지는,

“라자로처럼 살아야 한다.”가 아니라,

“그런 부자처럼 살면 안 된다.”입니다.

나는 지금, 나의 삶이 그 비유에 나오는 부자의 삶과

같기를 바라고 있는 것은 아닌가?

거짓 평화라고 해도 좋으니 사는 동안에

그렇게 편안하고 즐겁게 살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은가?

사는 동안 거짓 평화에 취해서 산다면

나중에 내세에서 참 평화를 누릴 자격이 없습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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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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