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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부활 제5주간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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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조재형 쪽지 캡슐 작성일2025-05-22 조회수124 추천수5 반대(0)

우리는 각자 자라온 문화 속에서 하느님을 만납니다. 한국은 참 독특한 식문화를 가진 나라입니다. 김치, 된장, 고추장 같은 발효 음식은 시간이 오래 걸립니다. 오늘날처럼 빨리빨리 결과를 원하는 세상과는 정반대입니다. 발효는 기다림이고, 인내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동안에도 서서히 변하고, 깊어집니다. 우리 신앙도 그렇습니다. 오늘 하루 기도한다고 당장 믿음이 자라는 것이 아닙니다. 오랜 시간 동안 묵묵히 기도하고, 사랑하고, 회개하면서, 조금씩 조금씩 하느님과 닮아가는 것입니다. 또 한국은 함께 밥을 나누는 문화를 소중히 여깁니다. 한솥밥을 먹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식탁은 단순히 배를 채우는 자리가 아니라, 마음을 나누는 자리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함께 성체를 나누는 미사의 정신과도 닮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당신 몸을 떼어 주셨듯, 우리는 서로를 위해 시간과 정성을 나눌 때 참된 공동체가 됩니다. 서양에서는 때때로 우리의 발효 음식이나 식습관을 이해하지 못하고 비판적으로 보기도 했습니다. 냄새가 강하다, 너무 강렬하다, 그렇게 말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 냄새와 기다림 속에는 조상의 삶이 담겨 있고, 한민족의 인내와 사랑이 녹아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신학교에 다닐 때 '토착화(土着化)'라는 개념을 배운 기억이 납니다. 복음은 시대와 문화를 초월하는 진리입니다. 하지만 진리가 사람들 안에 뿌리를 내리려면, 반드시 그 땅의 문화와 전통을 만나야 합니다. 복음은 어느 민족, 어느 시대에도 '새로운 생명'을 주지만, 그 생명은 항상 '그 땅의 언어''그 땅의 삶의 방식' 안에서 꽃피워야 했습니다. 초기 교회는 로마 제국 안에서 자리 잡았고, 로마의 법과 제도가 자연스럽게 교회 규범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복음은 로마에 머물지 않고 아시아, 아프리카, 남미로 퍼져 나갔습니다. 그때마다 문화적 충돌이 일어났고, 특히 아시아에서는 심했습니다. 조선을 예로 들면, 조상 제사가 가장 큰 문제였습니다. 조상에 대한 공경은 단순한 예절을 넘어 삶의 뿌리를 잇는 행위였습니다. 그런데 서양 선교사들은 이를 우상숭배로만 보고 무조건 금지하려 했습니다. 갈등이 깊어졌고, 결국 박해와 순교로 이어졌습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사도행전 말씀은 이와 비슷한 갈등을 보여줍니다. 초대 교회도 이방인 신자들을 받아들이면서 갈등을 겪었습니다. "할례를 받아야 하는가? 모세 율법을 지켜야 하는가?" 오랜 논쟁 끝에 사도들은 성령의 인도하심. 안에서 이렇게 결론을 내립니다. "성령과 우리는 다음의 몇 가지 필수 사항 외에는 여러분에게 다른 짐을 지우지 않기로 하였습니다. , 우상에게 바쳤던 제물과 피와 목 졸라 죽인 짐승의 고기와 불륜을 멀리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것들만 삼가면 올바로 사는 것입니다." 핵심만 지키고, 나머지는 각자의 문화 안에서 자유롭게 복음을 살도록 허용한 것입니다. 사랑에서 비롯된 깊은 지혜였습니다. 선교사 리카르도 주교는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복음은 진리이지만, 복음이 꽃을 피우기 위해서는 그 땅의 물과 햇빛을 받아야 한다." 진리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진리가 각 문화의 삶 속에서 살아 숨 쉬게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조선 교회도 이와 같은 길을 걸었습니다. 그 중심에 정하상 바오로 성인이 있었습니다. 정하상 성인은 박해가 거세질 때, 조선의 왕에게 상재상서(上宰相書)를 올렸습니다. 이 탄원서에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늘과 땅과 만물을 창조하신 하느님을 섬기는 것이 어찌 나라의 도리를 해치는 일이겠습니까?" 또한 그는 조상 제사 문제에 대해 아주 지혜로운 답을 제시했습니다. "우리는 조상을 공경합니다. 그러나 조상을 신으로 섬기지는 않습니다. 조상을 위한 참된 공경은 하느님께 대한 참된 경외심 안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는 복음을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조선의 전통을 존중하려 했던 것입니다. 억지로 문화를 없애려 하지 않고, 그 안에서 복음을 해석하고 살리려 했습니다. 정하상 성인의 이 태도는 오늘 사도행전에서 들은 사도들의 결정과 닮았습니다. 몽테뉴는 수상록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러 민족의 풍습을 이해하는 것은 인간을 이해하는 첫걸음이다." 사랑은 이해로부터 시작됩니다. 이해하지 못하면 사랑할 수 없습니다. 복음은 모든 문화 안에 뿌리내릴 수 있습니다. 정원에 다양한 꽃이 피어야 더욱 아름답듯이, 우리 신앙 공동체도 다양한 사람이 모여야 더욱 풍성해집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이렇게 명령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은 이것이다. 서로 사랑하여라." 사랑은 다름을 끌어안는 것입니다. 사랑은 억지로 바꾸려 하지 않고, 그 안에서 하느님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오늘 하루,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은 단순합니다. 서로 사랑하는 것. 서로를 존중하는 것. 서로 안에서 하느님의 뜻을 발견하고 기뻐하는 것. 복음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항상 살아 숨 쉬는 인간의 삶과 문화 안에서 꽃피워야 합니다. 우리도 서로 다른 이들을 품고, 사랑으로 복음을 심는 사람들이 되면 좋겠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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