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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부활 제6주일 다해, 청소년 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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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박영희 쪽지 캡슐 작성일2025-05-25 조회수67 추천수3 반대(0) 신고

[부활 제6주일 다해, 청소년 주일] 요한 14,23ㄴ-29 “너희가 나를 사랑한다면 내가 아버지께 가는 것을 기뻐할 것이다. 아버지께서 나보다 위대하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장례미사 때 고인의 유가족분들이 공통적으로 가장 크게 후회하시는 점은 ‘생전에 더 잘해드리지 못한 것’입니다. 고인이 살아계실 때 말 한 마디라도 더 따뜻하게 해 드리지 못하고 가시 돋힌 말, 차갑고 쌀쌀맞은 태도로 마음을 아프게 해 드린 것이 큰 죄책감으로 남는 겁니다. 또한 어색하고 부끄럽다는 이유로 사랑한다는 표현을 제대로 하지 못한 것이, 고인분이 좋아하시던 음식, 가고 싶어하시던 장소, 하고 싶어하시던 일을 더 꼼꼼하게 챙겨드리지 못하고 나중으로 미루기만 했던 것이 뼈저린 후회로 남지요. 그러나 아무리 가슴을 치며 괴로워한들 이미 지나가버린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습니다. 남아있는 가족들이 고인에게 해 드릴 수 있는 최고의 보답이자 사랑은 바로 그분께서 살아계실 때 다 이루지 못하고 남긴 뜻, 즉 “유지”(遺志)를 받드는 일입니다. 고인이 평생을 노력했음에도 다 못이루어서 후회로 남은 그 뜻이, 나의 행동과 삶을 통해 이루어지고 완성되면, 비로소 세상에 대한 미련과 집착을 깨끗이 비워내고 완전히 자유로운 상태로 참된 안식을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유가족들도 마음을 무겁게 짓누르던 죄책감과 후회로부터 자유로워져 삶의 참된 기쁨을 누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은 최후의 만찬 석상에서 제자들을 발을 씻어주신 예수님이, 그들과 이별할 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아시고 마지막 유언을 남기시는 ‘고별담화’의 시작 부분입니다. 이 장면에서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으로 이끄는 원동력이 무엇인지, 당신이 부재하시는 동안 제자들이 겪게 될 혼란과 공포를 어떻게 이겨낼 수 있는지, 당신의 부활과 재림을 기다리는 우리가 마음 속에 간직해야 할 참된 가치가 무엇인지를 알려주시지요. 먼저 우리를 구원으로 이끄는 원동력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그 원동력이 ‘사랑’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하느님과 완전히 일치하여 그분과 함께 참된 행복을 누리는 것이 구원이며, 구원받기 위해서는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말씀하신 계명과 가르침들을 충실하게 지켜야 하지요. 그런데 그것을 제대로 지키기 위해서는 마지못해서 하거나, 안 지키면 벌 받을까 두려워 억지로 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주님을 향한 참된 사랑으로, 그분을 기쁘게 해드리기 위해 마음에서 우러나는 진심으로 임해야 성실하게, 그리고 꾸준히 주님의 계명과 가르침들을 지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에서 우러나오는 진심으로 주님의 뜻과 가르침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이들은 하느님 아버지로부터 큰 사랑을 받으며 참된 기쁨과 행복을 누릴 것입니다. 또한 그들의 모습을 통해 ‘하느님은 사랑이심’이 분명히 드러날 것입니다.

 

다음으로는 주님의 부활과 재림을 기다리는 우리가 마음 속에 간직해야 할 참된 가치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참된 평화’를 간직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당신께서 우리에게 주고자 하시는 참된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다르다고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세상이 주는 평화’는 힘으로 유지되는 팽팽한 긴장상태입니다. 강력한 힘을 지닌 세력들이 서로 상대방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고 각자가 만든 질서 안에서 안정적으로 살아가는 상태가 바로 세상이 주는 평화지요. 그러나 그 평화는 힘의 균형이 한쪽으로 기울어지거나, 어떤 세력이 과도한 탐욕에 휘둘리기 시작하면 금새 무너져버려 ‘아수라장’이 되고 맙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힘에 기대지 말라고 하십니다. 내가 상대적으로 더 큰 힘을 지녔다고 해서 그 힘을 함부로 휘두르며 제 욕망을 채우려 들어서는 안된다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주고자 하시는 참된 평화는 힘으로 다른 이를 억누르고 굴복시키는 게 아니라, 이해와 사랑으로 다른 이를 포용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여 획일적인 통일이 아니라 ‘다양성 안의 일치’를 이루는 것이지요. 그래야만 삶이 우리에게 주는 다채롭고 풍요로운 기쁨들을 온전히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러니 자라나는 우리 청소년들에게 싸워서 이기라고, 이겨야 원하는 걸 쟁취할 수 있다고 가르칠 게 아니라, 양보하고 배려하라고, 그래야 모두에게 진정 유익한 방향으로 함께 나아갈 수 있다고 가르쳐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주님께서 함께 계시지 않는듯한 절망과 두려움을 어떻게 이겨내는가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부재로 인해 큰 혼란과 공포를 겪게 될 제자들에게 참된 평화를 주실 것을 약속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도, 겁을 내는 일도 없도록 하여라.” 당신 권능으로 우리로 하여금 마음이 산란해지거나 겁을 내지 않게 만들어주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주님을 믿고 따르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마음이 산란해지거나 겁을 내는 것은 전적으로 자기 자신의 탓이지요. 주님을 믿기만 하면 나에게 불행이나 사고가 닥치지 않을거라고, 고통과 시련을 겪지 않을 거라고 제 멋대로 단정지어 버리기에, 그런 상황을 맞닥뜨리게 되면 어떻게 해석하고 받아들여야 할지 몰라 마음이 불안해지는 겁니다. 그리고 그 불안은 내 마음 속에 주님의 사랑에 대한, 더 나아가 그분의 현존에 대한 불신을 심어놓아 스스로를 더 큰 혼란에 빠뜨리지요. 한편, 주님을 믿고 따르기만 하면 내가 청하는 것을 들어주신다기에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는데 막상 내가 원하고 바라는대로 되지 않으면, 괜한 시간낭비를 한 것은 아닐까 겁이 나고 걱정이 되는 게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기도의 방향을 잘못 잡아서 일어나는 일이지요. 기도란 내가 원하는 것을 주님으로부터 얻어내기 위해 하는 게 아니라, 주님께서 바라시는 것을 나 또한 바라고 청하기 위해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나의 구원과 참된 행복을 위해 꼭 필요하고 참으로 유익하기 때문에, 주님께서 주시는 것들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제대로 받아들이기 위해 기도하는 겁니다.

 

우리 ‘마음이 산란해지거나 겁을 내는 일 없이’ 구원의 길을 꾸준히 걷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은 ‘하느님께 대한 믿음’입니다. 이는 너무나도 당연한 얘기처럼 들리지만, 사실 하느님께 대한 올바르고 참된 믿음을 지니기란 쉬운 일이 아니지요.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욕망과 고집을 놓지 못해, 마음 속에 ‘나만의 하느님 상’을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느님 대신 내가 만든 하느님의 ‘우상’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부활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죽어야만 한다는 당연한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하느님이 나를 위해 준비해주신 길을 마다하고, 당장 이익이 될 것 같은 길, 더 쉽고 편해보이는 길을 선택하려고 듭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앞둔 제자들이 그랬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하느님을 믿되 제대로 믿으라고 하십니다. 그분의 능력이면 내가 원하는 걸 얼마든지 이뤄주실 수 있다고 믿지 말고, 전능하신 하느님 바로 그분을 믿으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슬픔 속에서 기쁨을, 고통 속에서 영광을, 절망 속에서 희망을 주시는 하느님의 위대하심을 알아보고 기뻐하게 될 것입니다. 

 

* 함 승수 신부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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