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부활 제6주간 화요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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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조재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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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25-05-26 | 조회수125 | 추천수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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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자주 듣는 말 중에 “전화위복(轉禍爲福)”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불행이 바뀌어 오히려 복이 된다’라는 뜻입니다. “새옹지마(塞翁之馬)”라는 고사도 자주 인용됩니다. 국경에 사는 노인의 말이 도망갔다가 더 좋은 말과 함께 돌아왔고, 그 말 때문에 아들이 다리를 다쳤지만, 그 덕분에 전쟁에 끌려가지 않아 목숨을 건졌다는 이야기입니다. 겉으로 보기엔 나쁜 일도, 지나고 보면 좋은 일로 바뀌는 경우가 많습니다. 저 역시 그런 경험을 한 적이 있습니다. 군대에서 좋은 보직을 받고 생활하던 중에 저의 실수로 힘들고 외로운 곳으로 보직이 변경된 적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낙심했지만, 그 시간 덕분에 저는 저 자신을 돌아볼 수 있었고, 더 깊은 기도와 묵상으로 3년 군 생활을 의미 있게 보낼 수 있었습니다. 30년 전에는 주교님의 결정으로 미국에서 공부할 기회가 있었지만, 또 저의 부족함으로 인해 그 기회를 잃었습니다. 당시에는 참 낙심이 컸습니다. 그런데 지금 되돌아보면, 그 시간 덕분에 저는 더 단단해졌고, 하느님께서 더 좋은 시간에, 더 좋은 방식으로 저를 미국으로 이끄셨습니다. 그 결과 지금은 6년 넘게 이곳에서 사목하면서 많은 은총을 체험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자칫 실망하고 낙심하려는 순간, 우리는 이렇게 자문해야 합니다. “지금 내가 겪는 이 고통, 이 실패, 혹시 하느님의 쉼표는 아닐까?” 우리는 하느님께서 쉼표를 찍은 자리에 마침표를 찍는 실수를 하지 말아야 합니다. 끝날 때까지는 끝난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도 우리에게 이 점을 다시금 일깨워 줍니다. 바오로와 실라스는 투옥되었지만, 그 어둡고 고통스러운 감옥 안에서조차 찬미의 노래를 불렀습니다. 지진으로 감옥 문이 열렸을 때, 간수는 절망하여 자결하려 했지만, 바오로는 “우리는 여기 있다”라고 외쳤습니다. 이 한마디가 간수의 마음을 열었습니다. 그는 묻습니다. “두 분 선생님, 제가 구원을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리고 바오로는 말합니다. “주 예수님을 믿으시오. 그러면 그대와 그대의 집안이 구원을 받을 것이오.” 간수는 그날 밤 세례를 받고, 온 집안이 함께 하느님을 믿게 되어 기뻐했습니다. 한밤중의 감옥이, 죽음을 생각하던 순간이, 오히려 구원의 새벽이 된 것입니다. 이보다 더한 전화위복이 있을까요? 복음에서도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 이롭다.” 제자들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을 겁니다. 어떻게 예수님이 떠나는 게 이로울 수 있을까요? 하지만 예수님은 떠나시고, 성령 보호자께서 오셨습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죄와 의로움과 심판에 관한 세상의 그릇된 생각을 바로잡아 주십니다. 빅터 프랭클은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고통 속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인간은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의 태도를 선택할 수 있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입니다. “고통이 의미를 찾을 때, 인간은 그것을 견딜 수 있다.” 우리 인생에 뜻밖의 시련과 실패가 찾아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버리셨다고 생각하기보다는, 오히려 그 순간이 우리를 성숙시키고, 더 깊은 믿음의 자리로 초대하는 하느님의 쉼표일 수 있다고 생각하면 좋겠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새로운 길을 이야기하십니다. 그것은 바로 진리의 성령입니다. 진리의 성령께 의탁하면 죄와 의로움과 심판에 관한 세상의 그릇된 생각이 밝혀질 것이라고 이야기하십니다. 세상의 그릇된 기준은 무엇입니까? 부정한 여인을 돌로 치려고 했던 단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죄가 없는 이들이 먼저 돌을 던지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부정한 여인의 죄를 묻지 않고 용서해 주셨습니다. 의로움을 독점하려고 하는 권위주의입니다. 의로움은 권위주의에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의로움은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는 봉사에서 드러납니다. 십자가를 지는 희생에서 드러납니다. 예수님을 십자가형에 처한 빌라도의 심판은 불의한 심판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심판하기 위해서 예수님을 보내신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예수님을 보내신 것입니다. 남의 눈에 있는 작은 티를 보기 전에 내 눈에 있는 큰 들보를 볼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러니 바오로 사도가 말한 세 가지를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늘 기도하고, 항상 감사하고, 언제나 기뻐하십시오.” 우리의 삶이 전화위복이 되는 은총의 여정이 되면 좋겠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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