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송영진 신부님_<하느님은 사랑이신 분이니, ‘사랑으로만’ 섬겨야 합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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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최원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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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25-05-26 | 조회수40 | 추천수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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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버지에게서 너희에게로 보낼 보호자, 곧 아버지에게서 나오시는 진리의 영이 오시면, 그분께서 나를 증언하실 것이다. 그리고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나를 증언할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너희가 떨어져 나가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사람들이 너희를 회당에서 내쫓을 것이다. 게다가 너희를 죽이는 자마다 하느님께 봉사한다고 생각할 때가 온다. 그들은 아버지도 나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러한 짓을 할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그들의 때가 오면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을 기억하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15,26-16,4ㄱ).”
1) “너희를 죽이는 자마다 하느님께 봉사한다고 생각할 때가 온다.” 라는 말씀에서, 바오로 사도가 ‘사울’이라고 불리던 박해자 시절이 연상됩니다. “사울은 교회를 없애 버리려고 집집마다 들어가 남자든 여자든 끌어다가 감옥에 넘겼다. 사울은 여전히 주님의 제자들을 향하여 살기를 내뿜으며 대사제에게 가서, 다마스쿠스에 있는 회당들에 보내는 서한을 청하였다. 새로운 길을 따르는 이들을 찾아내기만 하면 남자든 여자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끌고 오겠다는 것이었다(사도 8,3; 9,1-2).” 또 바오로 사도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 이렇게 증언했습니다. “여드레 만에 할례를 받은 나는 이스라엘 민족으로 벤야민 지파 출신이고, 히브리 사람에게서 태어난 히브리 사람이며, 율법으로 말하면 바리사이입니다. 열성으로 말하면 교회를 박해하던 사람이었고, 율법에 따른 의로움으로 말하면 흠잡을 데 없는 사람이었습니다(필리 3,5-6).” 바오로 사도가 ‘사울’이라고 불리던 시절에, 그리스도 교회를 박해하는 일에 앞장선 것은, 그렇게 하는 것이 하느님에 대한 신앙이고, 충성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울’뿐만 아니라 당시의 열성적인 바리사이들은, 하느님에 대한 ‘충성심’으로 그리스도교를 미워했고, 박해했습니다. <당시에 박해자 편에 선 사람들은 대부분 그랬습니다.> 하느님에 대한 충성심과 열성 자체는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충성심과 열성의 방향이 잘못되었음을 깨닫지 못하고, 증오심과 분노에 사로잡혀서 폭력과 살인을 저질렀으니, 그들은 ‘큰 죄’를 지었습니다. 목적은 수단을 정당화하지 못합니다.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모르는 것도 잘못이고, 하느님께 충성한다는 이유로 증오심과 분노에 사로잡혀서 폭행을 하고 살인을 하는 것은 하느님을 거스르는 죄입니다. “하느님을 위해서라면 무슨 짓을 해도 괜찮다.” 라는 말은 결코 용납될 수 없습니다.
2) 그런데 우리 교회 역사를 보면, 우리 교회가 박해를 받기만 한 것은 아니고, 박해를 하는 위치에 있었던 적도 많고, 바리사이들이 그랬던 것처럼 ‘하느님을 위해서’ 라는 명분으로 죄를 지은 적도 많았습니다. 오늘날에도 하느님을 믿는다고 말하는 자들이 ‘하느님을 위해서’ 라는 명분을 내세워서, 하느님을 거스르는 죄를 짓는 것을 볼 때가 있습니다.
3) “그들은 아버지도 나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러한 짓을 할 것이다.” 라는 말씀은, 박해자들은, 하느님과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모르고, 어떻게 섬겨야 하는지도 모르기 때문에 예수님의 교회를 박해한다는 뜻입니다. <알려 주는 사람이 없었다면, 모르고 있었던 것이 죄는 아닙니다. 그러나 알려 주는데도 믿으려고 하지 않고, 믿기를 거부하는 것은 죄입니다.> 우리는 사도 요한의 다음 말을, ‘하느님을 위해서’ 일할 때의 기준으로 삼아야 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머무르고 하느님께서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십니다(1요한 4,16ㄴㄷ).” 하느님은 ‘사랑이신 분’이니 하느님을 위해서 일할 때, 또 하느님을 섬길 때, 항상 ‘사랑으로만’ 해야 합니다. 만일에 무슨 일을 하든지 간에 사랑이 아니라 증오심과 분노로 한다면, 그것은 사랑이신 하느님을 거스르는 죄를 짓는 것입니다. <“사탄과 우상숭배는 미워하는 것이 옳지 않은가?” 라고 물을 수도 있습니다. 물론 사탄과 우상숭배 자체는 미워해야 하고, 물리쳐서 없애야 하는데, 사탄의 지배와 억압을 받고 있는 ‘사람’을, 또 어리석어서 우상숭배에 빠져 있는 ‘사람’을 미워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사람들은 ‘사랑으로’ 잘 타이르고, 잘 깨우쳐 주어서 구원의 길로 인도해야 합니다.>
4) 바오로 사도의 박해자 시절만 언급하는 것으로 그치고, 사도로 변화된 뒤의 열성에 대해서 말하지 않으면, 그것은 부당하고 불공평한 될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고백하고 증언합니다. “나는 전에 그분을 모독하고 박해하고 학대하던 자였습니다. 그러나 내가 믿음이 없어서 모르고 한 일이기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나에게 자비를 베푸셨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우리 주님의 은총이 넘쳐흘렀습니다(1티모 1,13-14).” “우리는 살아도 주님을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님을 위하여 죽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살든지 죽든지 주님의 것입니다(로마 14,8).” 바오로 사도는 ‘주님을 위해서’ 뜨겁게 살았던 신앙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뜨거운’ 신앙인이었습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 [출처] 부활 제6주간 월요일 강론|작성자 송영진 모세 신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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